1865년에 英陽 鄕中의 13인이 洞布制 시행에 관한 사항을 처분하여 내려줄 것을 縣官에게 요청한 牒呈
[내용 및 특징]
1865년 英陽 鄕中의 趙,吳,朱,鄭,禹,南,權,金,李,琴,具,朴,韓 이상 13명이 兼 縣官에게 보낸 牒呈이다. 牒呈에서는 지난번에 요청하였던 洞布의 시행에 관한 처분을 속히 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兼 縣官은 洞布에 관한 사항은 아직까지 그 실효에 대한 논의가 복잡하고 따라서 일시에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는 題音을 내리고 있다.
이 牒呈은 조선후기 軍役制에 관련한 것으로 당시 논의, 시행되었던 洞布制에 대한 사항을 담고 있다. 조선후기 일반농민의 軍役에 대한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均役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양역의 폐단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고, 軍役制의 산출과 배정이 總額制로 운영되면서 지방에 배정된 軍額을 책납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과중한 부세를 피하기 위한 도망이나 기근 또는 질병으로 인한 유망은 점차 증가하여 각 지방에는 虛口가 많아졌으나 배정된 軍額은 반드시 채워야 했기에 面里의 남은 농민이 隣徵·族徵·黃口添丁·白骨徵布 등이 형식으로 이중 삼중의 役事를 부담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점차 軍役에 대한 부정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향촌민들은 공동의 자산을 소유하여 공동책납에 대응하려 하였고 그에 따라 洞布制가 점차 실시되게 되었다. 洞布制의 운영은 軍布契와 軍役田의 설치가 대표적인 것으로 軍布契는 군역에서 제외되는 朝官·鄕官·軍官·校生·私奴·下隸 등 누구를 막론하고 군역을 부담하는 상민과 마찬가지로 일률적으로 契金을 내고 그 기금을 통해 殖利를 하고 그 利息으로 군역세를 수납하는 것이었다. 軍役田은 향촌민이 공동으로 농지를 마련하고 경영을 통해 그 수입으로 闕額이 된 군액의 세를 수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洞布制는 단순한 공동납세가 아닌 避役을 겸하는 것이었다. 즉 面이나 理 단위로 세액을 부담하는데, 軍籍上의 軍戶와 保는 虛名으로 작성하여 액수만 채우고, 실제 부담자는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 액수는 실제로 軍役에서 면제 되었던 兩班까지 포함하여 부담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세적인 軍役稅의 원칙을 부정하고 사실상 戶布制와 같은 효과로 신분제 운영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분제원리의 부정이라는 측면으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정부로서는 금지하고 있었지만, 조세수입 확보를 위해 묵인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官의 부세수탈과 소민들의 저항이 점차 거세짐에 따라 촌락자체의 재생산 기반조차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사족들의 입장에서도 향촌사회의 안정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사족층도 洞布制에 참여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2년 三政의 문제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일어난 삼남지방의 농민항쟁은 정부로 하여금 일정한 개혁조치를 강제하게 하였으며 결국 哲宗 13년 三政釐整廳에서 洞布制를 공인하게 되었다. 당시 三政釐整廳의 개혁안을 살펴보면 “校院保率·各廳契防을 모두 革罷하여 함께 本役에 還屬시키며 冒稱儒生·假托勳裔를 摘發하고 구별하여 充定하고 墓村成戶도 즉시 出役시키고, 口疤와 洞布 중 量宜하고 規式으로 정하여 原額을 채울 수 있도록 할 것”이라 하여 기존에 ‘逐名疤定(=口疤)’하던 개별첨정방식의 군역수취방식 뿐만 아니라 공동납부 방식인 洞布制를 병행하여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三政釐整廳에서의 공인으로 인해 洞布制는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洞布制의 운영은 각 지역별로 상이함이 있으나 그 부과대상을 대체로 양반인 大民, 중인인 中民, 그리고 일반 농민인 下民으로 구분하였다. 부담액은 大民은 中民보다 부담액이 적고, 中民 역시 小民보다 부담액이 적었다. 비록 신분적 격차가 존재하였지만 이러한 격차는 점차로 균등화되어 갔으며, 이는 향촌내 모든 계층에게 군역이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큰 변화였다.
이러한 洞布制는 양반 지배계층에게도 軍役稅를 분담시킨다는 점에서 戶布制시행의 단서가 된 戶布制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양반층이나 부유층의 이해관계과 결부되는 것이였기에 지역에 따라 洞布制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컸으므로 興宣大院君이 1871년 戶布法을 실시할 때까지 전면 실시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실시되었다.
英陽縣의 경우에는 洞布制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고 그 시행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縣官의 題音으로 보아 洞布制가 정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실정은 파악할 수 없으나 鄕內에 洞布制에 관한 논란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시행되었던 軍役制의 일종인 洞布制에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당시 洞布制가 비록 중앙정부에 의해 공인되었으나 각 지역의 상황에 따라 시행여부는 상이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의 牒呈을 통해 洞布에 대한 조치를 문의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鄕中 내에서 洞布制의 시행여부가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한국사연구, 宋亮燮, 한국사연구회,1995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