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英陽鄕校에서 縣官에게 鄕校의 수리를 요청하는 牒呈
내용 및 특징
1863년 英陽鄕校에서 鄕校 大成殿 수리를 요청하는 牒呈이다. 문서의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힘들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그 내용을 대강 살펴볼 수 있다. 이 牒呈은 鄕校의 趙,吳,鄭,權,南,朴,琴,李,尹,具,韓 11명이 올린 것으로 大成殿의 수리를 요청하고 있다. 大成殿외에도 客舍의 殿闕에 대해 牒呈과 題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客舍와 大成殿의 상황이 좋지 않음이 이미 오래된 일이니 조속히 수리를 시행하라는 題音으로 보아 이후 大成殿은 물론 客舍의 수리도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鄕校는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교육처일 뿐만 아니라 孔子의 位牌를 奉安·享祀하는 공간으로 敎化의 중심지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오면서 鄕校의 교육기능은 점차 상실하였으나 祭禮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祭禮기능이 강화된 원인은 조선후기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明 ·淸의 교체는 조선사회에 커다란 사상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小中華意識의 강조와 朱子學의 절대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文化理念的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社會的 動搖를 수습하는 데에도 祭禮의 강화는 필요하였던 것이다. 즉 경제적, 그리고 사회신분제의 변화에 대처하고자 중앙과 兩班士族들은 禮俗을 강조하였고, 향교의 경우에는 先賢에 대한 祭禮의 강화와 이를 통한 下層民에 대한 敎化가 강조되었다. 그에 따라 祭禮이 중심처인 大成殿은 守令이 반드시 살펴야 할 중요한 공간이였다.
이러한 大成殿 외에 客舍 또한 중요한 건물이었다. 客舍는 각 고을에 설치했던 館舍로 지방을 순시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는 公務處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 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望闕禮를 행하던 祭禮의 장소였다.
이렇듯 鄕校의 大成殿과 客舍는 祭禮의 공간이며 곧 敎化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守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건물의 관리에 物的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英陽鄕校의 牒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英陽鄕校와 客舍의 修理에 관련한 牒呈으로 鄕校와 客舍의 연혁을 일부나마 알 수 있으며 조선후기 官의 鄕校에 대한 지원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一朝閣,1990.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