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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XB.1900.4723-20100731.Y1010417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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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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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손정규, 윤희태, 정치륜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작성시기 1900
형태사항 크기: 42 X 3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안내정보

1900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상서(上書)
1900년 12월에 영천군의 유학(幼學) 손정규(孫正奎)>등이 자격조건을 갖추지도 못하고 횡포만을 일삼는 영천향교향장유인석(兪仁錫)의 교체를 영천군수에게 청원하는 상서(上書).
남민수

상세정보

1900년 12월에 영천군 유학(幼學) 손정규(孫正奎)윤희태(尹喜泰)등이 자격미달에다 횡포를 일삼는 영천향교향장유인석(兪仁錫)을 교체해 줄 것을 영천군수에게 청원한 상서(上書)
내용 및 특징
1900년 12월 영천군유학손정규(孫正奎)윤희태(尹喜泰)정치륜(鄭致倫) 등이 자격도 없고 횡포를 일삼는 영천향교향장(永川鄕校鄕長)유인석(兪仁錫)의 교체를 청원한 상서(上書)이다. 상서의 내용에 의하면,유인석은 원래 영천사람이 아니라 경산(慶山)사람으로, 영천에 거주한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수단을 부려 영천향교향장이 되었다고 한다. 유인석은 향장이 된 후, 향교의 여러 직임과 고을의 아전들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숱한 횡포를 부렸다. 이 때문에 향교의 여러 직임과 교생이 연명으로 영천군수에게 유인석을 향장의 직임에서 교체하고 덕망있는 인물을 향장에서 선출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자료적가치
조선시대 전기에는 유교적 교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지방 향교의 운영에 대해서 조정과 중앙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향교의 발전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지방의 사림들과 향리층 등이 향권을 장악하였고, 향교가 군역의 도피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수령의 향교에 대한 영향력은 쇠퇴하여 겨우 형식적으로 향교의 제반사항을 승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향촌에 대한 영향력은 지방수령보다 향교의 교임이 더더욱 컸다. 따라서 교임은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문벌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자격한 지방의 유력자가 종종 교임을 차지하여 신분질서의 문란을 가져오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남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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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00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상서(上書)

永川居幼學孫正奎尹喜泰鄭致倫等謹再拜上書于
閤下伏以惟永謂有綱紀之鄕而新章以後薦出鄕長之任必於士族中有地望齒德者以承
朝家之勅諭以補官政之得失以燭民事之艱難公務擧行一節大有關係者也今此
仁錫素以慶山賤人寓居玆鄕之不幾年濫生圖任之計加年以欺誣官廳帶名鄕長
已至六七之久而蔑視鄕員尊事吏校儕類使令渠則當然任是體重則非徒一鄕之
羞痛有欠於庶務之規矩鄕會之席以不然曉言則反含之處之微賤觸處射毒萬
民呼寃一鄕齊聲禀告三特遞鄕長愚避仁錫恃其富暴能討鄕且怒甲移
乙講誣呈訴 校宮之任豈不駸然渠爲鄕長則亦是士類以莫重齋任無故呈官
豈有蔑法無賴之人乎不可尋常置之玆敢齊聲仰訴伏乞 洞燭敎是後兪仁
諸般罪狀以律勘處使此鄕長之任無敢賤執而以擇德望之士俾無邑府之
紛拿事千萬伏祝
觀察閤下 處分
庚子十二月 日
曺秉熹
成規鎭
李殷和
尹頭弼
鄭鎭甲
李熙鍊
金濟川
柳榮夏
待新政擧訴向事
光武五年一月
三十一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