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지금의 경상남도합천군봉산면 일대에서 결성된 玉溪亭續契의 계원 명부로 1955년에 작성
玉溪亭續契名案乙未十一月日 玉溪亭續契名案
[내용 및 특징]
지금의 경상남도합천군봉산면 일대에서 시행된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日」이란 제목으로 成冊되어 있다. ‘續契’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조선시대까지 실시되다 일제강점기 동안 단절되었던 玉溪亭契를 1954년에 다시 결성했기 때문이다. 옥계정계가 실시되었던 곳은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三嘉縣에 소속된 지역이었다. 합천군에 편입된 후에는 합천군봉산면노파2구로 있다가 1980년대 초반 합천댐 건설로 수몰된 곳이다. 지금은 고삼리에 편입되었다.
옥계정계의 처음 명칭은 당시의 동리 이름을 따서 玉溪洞契라고 불렀다. 그러다 옥계동에 玉溪亭을 설립하면서 정자 이름을 따 옥계정계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합천댐 건설로 현재 옥계정은 述谷里에 위치해 있다. 옥계정에는 옥계정계와 관련하여 본 자료를 비롯해, 「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1704), 「洞案 己亥年修正」(1719), 「洞案」(1685~1701), 「洞案 新案」(1685~1766), 「洞案」(1735~1765), 「玉溪洞先案」(1786), 「玉溪洞先案」(1816), 「玉溪洞案」(1798), 「玉溪洞案」(1884), 「玉溪亭契案」(1978), 「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보존되어 있다.
「옥계정속계명안 을미11월일」은 1954년 옥계정계를 속계하고 1955년 당시의 계원 명단을 기재한 후, 1958년에 金永善이 작성한 序文과 1980년까지 새로 가입한 계원 명단의 追錄을 앞뒤로 첨부하여 성책한 것이다. 명안의 가장 앞부분에는 김영선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옥계정계 관련 자료 중 계의 유래를 문자로 언급하고 있는 자료는 이 서문이 유일하다. 이 서문과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옥계정계가 17세기 무렵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문에는 옥계정이 새롭게 복구되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먼저 옥계정이 합천을 지나는 香江과 옥계 사이에 8~9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옥계의 서쪽 언덕에 정자가 있으니, 하천의 이름을 따 옥계정이라 불렀다며, 옥계정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 옥계정에는 存養齋 宋挺濂이 記文을 작성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그 터조차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옥계정은 속계 된 이후인 1959년에 중건되었다가, 합천댐 건설로 술곡리 일대로 옮겨진 상태이다. 이어 옛적 마을의 현자들이 옥계정에 蘭亭에서처럼 시를 읊고, 藍田의 향약으로 서로 권장하고 부조했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이곳에서 옥계정계가 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마침 근래에 玉溪洞案 9책이 魚씨 집안에서 발견되었고, 옛 전통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1954년에 崔琪煥이 중심이 되어 옥계정계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서문을 작성한 김영선은 옥계동안에 이름이 수록된 金克敏의 후손이며, 최기환과 당시 옥계정계를 부활시킨 마을사람들도 역시 동안에 나오는 역대 계원들의 후손이다. 한편, 서문에서 김영선은 마을 고로(故老)로부터 옛적 마을에 洞規와 동안이 있어 자들이 함부로 不義를 행하지 못했으며, 그 條例가 매우 엄밀했다는 말을 젊은 시절에 들었다고 회상하는 부분이 나온다. 김영선이 1894년생이고, 조선시대 동안 중 가장 근래 것이 1884년에 만들어진 「옥계동안」임을 감안할 때, 20세기 전후해서 옥계정계가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서문에는 속계가 이루어질 때, 마을을 떠난 자들과 기존 동안에 수록되어 있는 선조의 계보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아 속계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서문 다음에는 1954년 속계 당시의 계원 명단이 성명과 字, 생년 干支, 本貫, 거주지 순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명단이 기재된 각 면 가운데에는 ‘玉溪亭印’이라는 印文이 새겨진 印章이 찍혀있다. 계원들의 거주지는 魯坡, 社倉, 述谷, 竹竹, 磻溪 등으로 모두 옥계정계가 실시되었던 옥계동과 그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계원들은 연령순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최고령자는 당시 76세였으며, 20세 전후의 청년층도 다수 이름을 올리고 있다. 모두 176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성씨별로는 慶州崔氏 44명, 淸州慶氏 21명, 義城金氏 21명, 咸從魚氏 19명, 昌寧曺氏 15명, 恩津宋氏 14명, 高靈朴氏 13명, 安東權氏 12명, 晋陽柳氏 8명, 星山全氏 5명, 咸陽吳氏 4명이다. 성씨별 분포를 보았을 때, 당시 옥계정계를 경주최씨・청주경씨・의성김씨・함종어씨 등의 가문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 때 작성된 동안에서도 확인된다.
1955년의 계원 명단 다음에는 1956년 3월 25일부터 1년 또는 최대 4년 간격으로 추록된 계원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마지막 1980년까지 모두 119명이 추록되었는데 1955년 명단에는 확인되지 않는 南平文氏・密陽朴氏・軍威方氏・陜川李氏 등이 다수 나타난다. 이들 성씨는 조선시대 때 작성된 동안에서 다수 확인되는 성씨로 1955년 최초 속계명안 작성 당시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추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명단의 기재방식은 1955년의 것과 동일하며, 외지로 이주한 계원의 경우 외지 거주지를 기재해 놓았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추록 인원은 줄어드는데, 대도시로의 인구유출에 따른 농촌 인구 감소와 관련이 있다. 1980년 이후의 옥계정계 명단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옥계정이 위치한 술곡리에 거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4년 속계가 되면서 옥계정계가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산업화에 따른 대도시로의 인구 유출, 농촌의 고령화, 1980년대 합천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 거주민들의 분산 등으로 사실상 옥계정계의 전통이 다시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洞里를 단위로 실시되었던 洞契가 현대사회에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해방 이후 경상남도합천군봉산면 일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에 의해 한 동안 중단되었던 옥계정계가 복구되는데, 이때의 동계는 조선시대 때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당시의 동계는 선조들의 전통문화 및 정신계승, 향촌 내 결속력 강화, 일족 간의 친목 도모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陜川댐水沒誌』, 慶尙南道, 慶尙南道, 1988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