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경상도의 大邑 密陽府에서 만들어졌던 여러 향안을 1911년 4월에 筆寫本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密陽鄕案이란 제목으로 成冊되어 있으며, 末尾에는 밀양 출신의 유학자 安禧遠이 작성한 後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중기 이래 밀양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향안이 간행되거나 필사된 향안이 많이 만들어졌었다. 지금까지 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본이 발견되었는데, 본 密陽鄕案은 그 중에서도 가장 후기에 만들어진 것 중 하나이다.
일찍이 영남 士林의 淵藪로 불렸던 만큼 密陽 재지사족들의 활동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확인이 된다. 사족들에 의한 향촌자치기구 정비에 앞장섰던 金宗直이 밀양 출신이란 점은 그러한 특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전부터 성리학적 규범을 바탕으로 한 鄕規를 제정하였고, 吏族들을 배제한 배타적 鄕案 작성이 이루어졌었다. 향안은 원래 留鄕所 또는 鄕廳이라는 각 고을의 지방자치기구 구성원들의 명단이다. 향안은 단순히 명단의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 내 사회적 위치를 보장 받는 수단이었다. 사족 중심의 향촌 내 지배질서체제를 구상하였던 밀양의 재지사족들은 향안 작성을 독점함으로써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본 자료는 밀양향안에 입록되었던 역대 인물들을 망라해 놓은 것이다. 가장 앞에는 1624년 密陽鄕案이 중수될 때, 지역 출신의 유학자 朴壽春이 작성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 重修鄕案時註錄書式, 重修鄕案時鄕憲節目, 重修鄕案時有司, 密州鄕案, 1911년에 안희원이 작성한 後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먼저 1624년 密陽鄕案 重修 시 작성된 박수춘의 서문은 그의 문집인 『菊潭集』에 「鄕案重修序」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수춘은 밀양부 土姓 출신의 재지사족으로, 선조 때부터 마련해온 재지적 기반과 鄭逑의 門人이라는 학문적 배경, 그리고 임진왜란 때 倡義를 한 경력을 바탕으로 전란 이후 향안 중수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명이다. 한편, 서문을 작성한 박수춘은 1603년에 鄕案 조직의 제 규정인 鄕規를 작성하기도 했었던 인물이다.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鄕案의 작성은 鄕黨人士의 이름을 기록한 것인데, 향당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모두 기록할 수 없기에, 取捨하는 규칙이 없을 수 없다. 이는 列邑에서 通用되는 규칙으로, 우리 영남에서 특히 마음을 쏟는 것이다. 밀양은 비록 아래 지방에 치우쳐 있지만 출중한 인재가 간간히 배출되었기에, 여러 文獻을 통해 훌륭하다고 일컬어져 왔던 곳이다. 그간 향당에 출입하고, 향안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모두 예의가 있는 인사이며, 문학하는 선비이니, 인재의 풍성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은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었다. 불행하게도 壬辰年의 변란으로 인해, 온 지역이 쑥밭이 되었으며, 집들은 무너지고, 일족이 滅한 가문이 십에 팔구였다. 이런 와중에 누가 鄕案을 지키며 전할 수 있었겠는가? 先輩의 遺蹟을 찾을 길이 없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진실로 사람을 서글프게 만들어 눈물을 뿌리게 하는구나! 지금 우리 몇 사람은 죽을 고생 끝에 혼란한 틈에도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오니, 보이는 쓸쓸한 정경에 서글퍼 한다. 누군들 遼鶴의 슬픔이 없겠는가? 오늘날 난리가 평정된 지 오래되어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향당의 大小事가 차츰 옛적 모습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오직 鄕射의 옛 풍습만은 아직도 폐하여져 다시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우리 향당의 큰 흠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들은 것을 각기 기록하여 舊案을 수정하게 되었다. 嘉靖(1522~1566) 연간 이전의 것은 世代가 멀고 전하여 내려오는 내용에 의문이 들기에 단지 알려진 人士들만 선택하여 수록하고, 嘉靖 연간 이후의 것은 目睹하지 못했으면 들은 것만을 기록하였다. 당시의 鄕員은 손꼽아 헤아릴 수 있었으나, 지금 수록한 숫자는 많지 않을 수 없는데 後生의 들은 기억은 오히려 자세하지 못하여 註錄에 詳略의 차이가 있다. 이번 일이 극히 외람되기는 하나, 이를 계승하여 增修하고 潤色하여 영구히 전하기를 꾀한다면, 선배가 세운 規範의 본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상 박수춘의 서문에서 확인되는 점은 먼저 壬辰倭亂으로 밀양부의 향안이 亡失되었고, 전후에 重修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舊安에 수록되었던 인물은 先老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복구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이후 향안복구는 재지사족들이 世居하고 있던 대부분의 고을에서 이루어졌었다. 재지사족들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향촌을 복구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향안 중수에 주력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이루어진 空名帖 남발과 納粟으로 사족으로의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단연 기존 재지사족들에게 있어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재지사족들은 신분적 지배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으로 향안 중수를 위한 작업을 서둘렀던 것이다. 한편 향안중수가 완성된 시기는 1624년이다. 전란이 끝난 후부터 향안 입록자가 확인이 되나 새롭게 중수가 이루어진 시기가 仁祖反正 이듬해인 1624년임은 정국의 큰 변화가 밀양 지역 재지 세력 간 역학관계에 반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수춘의 서문 다음에는 입록자의 성명에 註를 다는 방식인 重修鄕案時註錄書式이 기재되어 있다. 서문이 작성되던 1624년에 규정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이 정해져 있다. 代를 이어 參錄한 자의 경우는 官, 姓名, 字, 출생년을 쓰고 누구의 子라는 것만 기재한다. 起身하여 參錄한 자는 官, 姓名, 字, 출생년을 쓰고, 本貫과 父의 이름 및 官을 함께 기입한다. 이상 重修鄕案時註錄書式은 본 鄕案 기재 방식에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다음에는 역시 같은 해 제정된 重修鄕案時鄕憲節目 3개조가 부기되어 있다. 향헌절목에는 鄕案 입록과 관련된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데, 절목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향안의 작성은 단지 鄕人의 성과 이름을 기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名分을 바로 잡고, 淑慝함을 알림으로서 鄕憲을 維持하여 混淆와 混亂이 불가함을 밝히는데 있다. 사람을 뽑을 때에는 마땅히 門閥과 人品,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評論으로써 取捨해야 할 것이다. 悖行이 있고 德을 잃어버린 자는 門閥이 비록 參錄할만하다 하더라도 許錄하지 않는다. 一, 사람들의 門地는 등급이 매우 많아 하나로 개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람을 취사할 때에 限域이 없으면 안 되니, 三參을 갖춘 子枝만 許錄한다. 一, 사람을 뽑을 때 그 可否는 公議에 따른다. 그 중에 혹 사사로움을 쫒아 공론을 모멸하고 이를 어기면서 入錄하는 자는 곧 先輩의 죄인이다. 무거운 벌을 내리고 鄕憲에서 추방한다.
이상 입록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내 門閥이며, 그 기준은 三參이었다. 三參은 三鄕이라고도 하는데, 三參을 갖추었다는 것은 父, 外祖, 妻父가 모두 해당 고을의 鄕案에 입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해당 고을에 있어서 명문 재지사족의 잣대가 되었다. 三參의 엄밀한 준수는 재지사족들만으로 구성된 폐쇄된 향안 운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三參을 확고히 함으로써 사족 중심의 배타적 향안 운영을 규약으로 제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三參의 적용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는 대체적으로 엄밀하게 준수되었었다. 하지만 재지사족의 향촌 내 지위가 약화되고,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新鄕 세력이 등장함으로서 그 기준이 二參으로 축소되거나, 아예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重修鄕案時有司는 1624년 향안 중수 시 이를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당시 有司로는 前府使孫起陽, 당시 座首였던 前副正安㺬, 당시 別監이었던 幼學 柳汝騆와 柳震樑, 그리고 宣敎郞 金瀷, 그 외 幼學 朴陽春, 幼學 全抑己, 幼學 李貴生, 幼學 孫諟訥, 幼學 金弘緖, 幼學 蔣暹, 前縣監權應生, 生員 孫義甲 등 모두 13명이 확인된다. 이들은 모두 당대 밀양 지역을 대표하던 사족들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倡義 경력을 가진 손기양, 박수춘, 안신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손기양은 임진왜란 전후 밀양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인물로, 비록 1624년 향안이 중수 될 때에는 생존해 있지 않았지만 임란 이후 향안 복구를 주도했던 인물이었기에 重修鄕案時有司에 수록된 것이다. 당시 좌수였던 안신은 손기양의 제자로 1622년 밀양의 鄕憲을 중수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었다. 박수춘도 손기양의 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郭再祐, 金沔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향안 중수 시 주도적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박수춘은 1603년 鄕規를 새롭게 만들 때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 외의 인물들도 당대 지역을 대표하던 元老 인사들이었다.
명단 부분인 密州鄕案에는 당대 鄕員들을 입록 시기 순으로 기입해 놓았다. 먼저 國初以來鄕先生案에 24명, 嘉靖甲辰(1544)以來鄕員에 171명이 기재되어 있다. 앞선 박수춘의 서문에 ‘嘉靖(1522~1566) 연간 이전의 것은 世代가 멀고 전하여 내려오는 내용에 의문이 들기에 단지 알려진 人士들만 선택하여 수록하고, 嘉靖 연간 이후의 것은 目睹하지 못했으면 들은 것만을 기록하였다.’라는 구절에서처럼 임진왜란으로 이전 자료가 亡失된 까닭에, 이 두 시기의 명부는 당대 인사들이 보고 들은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입록 시기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1601년부터는 해당 시기에 入錄된 자를 기재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萬曆辛丑(1601)春에 17명, 萬曆壬寅(1602)春에 7명, 萬曆甲辰(1604)春에 3명, 萬曆丁未(1607)冬에 6명, 萬曆癸丑(1613)夏에 4명, 萬曆己未(1619)冬에 4명, 萬曆庚申(1620)冬에 4명, 天啓甲子(1624)春에 7명, 天啓丙寅(1626)春에 3명, 天啓丁卯(1627)에 1명, 崇禎庚午(1630)春에 2명, 崇禎乙亥(1635)夏에 3명, 崇禎己卯(1639)春에 5명, 同年冬에 4명, 崇禎庚辰(1640)冬에 2명, 順治甲申(1644)春에 2명, 順治乙酉(1645)冬에 4명, 順治丁亥(1647)春에 4명, 順治戊子(1648)春에 4명, 順治庚寅(1650)冬에 5명, 順治辛卯(1651)冬에 2명, 順治壬辰(1652)冬에 2명, 順治甲午(1654)冬에 2명, 順治乙未(1655)冬에 21명, 順治丁酉(1657)冬에 3명, 康熙乙巳(1665)冬에 23명, 康熙己酉(1669)春에 12명, 康熙乙丑(1685)夏에 13명, 康熙辛未(1691)秋에 5명, 康熙辛未(1691) 8월 初2일에 30명이 입록되었으며, 同年同月 8월 初3일 入錄撤案의 4명까지 포함하면 총 403명을 확인 할 수 있다. 國初以來鄕先生案부터 1691년까지 33회의 입록 기록이 나타나며, 입록은 대략 봄과 겨울철에 주로 행해졌고, 평균 2년마다 이루어졌다.
입록자의 姓貫은 모두 45개가 확인되며, 본관 미상인 자가 5명이다. 성관 별 분포는 密城朴氏 77명, 密城孫氏 38명, 一直孫氏 32명, 廣州安氏 28명, 驪州閔氏 19명, 碧珍李氏 18명, 載寧李氏 17명, 驪州李氏 17명, 牙山蔣氏 17명, 星州李氏 10명, 金海金氏 10명, 潭陽李氏 9명, 全州柳氏 8명, 昌寧曺氏 8명, 安東權氏 7명, 光州金氏 6명, 平山申氏 6명, 長水黃氏 6명, 淸道金氏 5명, 水原金氏 5명, 咸安趙氏 5명, 晋州河氏 5명, 密城卞氏 4명, 豊州盧氏 4명, 興海崔氏 3명, 廣州金氏 3명, 咸平李氏 3명, 宜寧南氏 2명, 晋州柳氏 2명, 慶山全氏 2명, 善山金氏 2명, 晋陽姜氏 2명, 瑞興金氏 2명, 順天朴氏 2명, 金海裵氏 2명, 昌寧成氏 2명, 慶州李氏 2명, 大邱朴氏 1명, 坡平尹氏 1명, 綾城具氏 1명, 草溪鄭氏 1명, 玄風郭氏 1명, 全州李氏 1명, 淸州韓氏 1명, 延城李氏 1명 순이다.
입록자의 성관 분포는 크게 임진왜란 이전 입록자와 임진왜란 이후 입록자로 구분되며, 임진왜란 이전 입록자는 國初以來鄕先生案과 嘉靖甲辰以來鄕員을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國初以來鄕先生案의 존재는 적어도 1544년 이전에 밀양에서 鄕案이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추측케 해준다. 먼저 國初以來鄕先生案에 기재된 성관은 밀성박씨 9명, 밀성손씨 3명, 밀성변씨 2명, 진양강씨 2명, 광주안씨 2명, 재령이씨 1명, 여주이씨 2명, 평산신씨 1명, 풍주노씨 1명, 선산김씨 1명으로 나타난다. 國初以來鄕先生案에 수록된 자들은 조선왕조 개국 초부터 사림파에 의한 향촌지배가 실현되던 嘉靖 연간 이전까지 밀양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성명 앞에 표기된 관직도 左議政, 贊成, 判書, 大提學, 判中樞 등 고위 관직이 명기되어 있다. 일대의 문장을 주도하며 고관을 역임했던 卞仲良과 卞季良 형제, 左議政을 역임한 朴翊을 비롯하여 文狀家로 명성을 날린 盧琇와 孫若水, 士林派의 宗匠이었던 金宗直, 金宗直과 더불어 밀양 三賢(나머지 한 명인 申季誠은 嘉靖甲辰以來鄕員에 수록)으로 추앙받고 있는 朴漢柱 등이 확인된다.
國初以來鄕先生案 수록 인물들의 명망은 조선전기 밀양이 영남 士林의 淵藪로 불렸던 까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통해 조선전기 士族과 吏族의 분화가 한창 전개되던 시기, 밀양 지역의 향론을 주도 하던 가문을 조심스럽게 짐작 할 수 있다. 國初以來鄕先生案이 임진왜란 이후 사족들이 기억을 더듬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만 수록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즉 이것만으로는 조선전기 향촌 주도세력을 완전히 보여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밀양 지역에서 조선전기부터 명망 있는 인사가 많이 배출된 것은 高麗時代 때부터 土姓 가운데 上京從仕한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밀양의 토성으로는 孫, 朴, 卞, 金, 趙, 邊. 楊氏가 확인된다. 이 중 박씨는 고려 중기부터 上京從仕하여 사족으로 성장하였고, 조선전기에는 士林派와 勳舊派 가문이 京鄕에 포열한 大姓으로 성장하였다. 손씨도 조선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며 명문 사족으로 성장하였고, 변씨도 조선전기에 변중량 형제를 배출하며 명문 가문으로 성장 할 수 있었다. 고려중기부터 밀양 토성 출신의 上京從仕자가 생겼고, 이들과 他貫의 士族이 혼인관계를 맺어 麗末鮮初 妻鄕 또는 外鄕을 따라 밀양에 정착함으로써 밀양에는 토성 출신의 재지사족뿐만 아니라 他貫의 명문 사족들이 世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嘉靖甲辰以來鄕員은 1544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密陽鄕案에 기재되었었던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다. 역시 임진왜란으로 종전 향안이 亡失되어, 鄕案重修 당시 생존 인물들이 보고 들은 기억을 더듬어 제작된 것으로 명확하게 당대의 향촌 주도세력을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1624년 향안 중수가 仁祖反正 이듬해에 있었기 때문에, 北人 정권과 연관 있는 인물들이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嘉靖甲辰以來鄕員에는 모두 171명이 확인된다. 姓貫별 분포는 밀성박씨 30명, 여주민씨 18명, 밀성손씨 13명, 재령이씨 10명, 담양이씨 8명, 광주안씨 7명, 아산장씨 7명, 성주이씨 7명, 전주류씨 7명, 여주이씨 6명, 일직손씨 5명, 光州金氏 5명, 장수황씨 5명, 수원김씨 4명, 함안조씨 4명, 진주하씨 4명, 청도김씨 3명, 풍주노씨 3명, 흥해최씨 3명, 밀성변씨 2명, 평산신씨 2명, 서흥김씨 2명, 순천박씨 2명, 김해배씨 2명, 창녕성씨 2명, 경주이씨 2명, 의령남씨 1명, 진주류씨 1명, 경산전씨 1명, 선산김씨 1명, 대구광역시박씨 1명, 파평윤씨 1명, 능성구씨 1명, 초계정씨 1명 순이다.
16세기 말은 士林 세력에 의한 향촌지배질서 확립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嘉靖甲辰以來鄕員은 16세기 말 士林이라는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밀양 지역의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따르면 여전히 대표적 토성인 밀성박씨와 밀성손씨의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입록 姓貫이 34개로 대폭 증가함이 확인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大姓으로 성장한 밀양의 토성 사족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이들이 妻鄕과 外鄕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한편, 입록자 171명의 관직과 직역 등을 살펴보면, 단연 幼學이 99명으로 가장 많다. 하지만 절반 가까운 인물이 文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거나, 生員進士試에 합격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외 學行으로 인한 천거 등으로 除授 받은 하위 文官職, 西班 遞兒職, 기타 品階를 기록한 인물도 다수 확인된다. 國初以來鄕先生案처럼 당대를 대표하던 두드러진 인사가 확인되지 않지만, 밀양 출신 재지사족들의 활발한 중앙정계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처음 入錄 기록이 확인되는 萬曆辛丑(1601)春부터 康熙辛未(1691) 8월 初3일까지 90년간 31회에 걸쳐 입록된 자들의 가문은 임진왜란 전과 크게 차이가 나타난다. 모두 208명의 입록이 확인되는데, 姓貫별 분포는 밀성박씨 38명, 일직손씨 27명, 밀성손씨 22명, 광주안씨 19명, 벽진이씨 18명, 김해김씨 10명, 아산장씨 10명, 경주이씨 9명, 여주이씨 9명, 창녕조씨 8명, 안동권씨 7명, 재령이씨 6명, 성주이씨 3명, 평산신씨 3명, 경주김씨 3명, 함평이씨 3명, 청도김씨 2명, 여주민씨 1명, 담양이씨 1명, 전주류씨 1명, 광주김씨 1명, 장수황씨 1명, 수원김씨 1명, 함안조씨 1명, 진주하씨 1명, 의령남씨 1명, 진주류씨 1명, 경산전씨 1명, 현풍곽씨 1명, 전주이씨 1명, 청주한씨 1명, 연성이씨 1명 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本貫 미상 5명이 나타난다.
1601년부터 1691년까지의 17세기 밀양향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로운 가문의 향안 입록이다. 여전히 토성인 밀성박씨와 밀성손씨가 지역 내에서 강력한 향권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他貫 가문의 입록 비중의 변화는 향권 주도세력의 추이를 추측 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國初以來鄕先生案과 嘉靖甲辰以來鄕員에서는 입록되지 못했던 姓貫이 확인된다. 벽진이씨, 김해김씨, 창녕조씨, 안동권씨, 경주김씨, 함평이씨, 현풍곽씨, 전주이씨, 청주한씨, 연성이씨가 그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도 벽진이씨와 김해김씨의 등장이 두드러져, 각각 18명과 10명을 향안에 입록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벽진이씨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順治乙未(1655)冬에 입록된 幼學 李道熙부터 확인된다. 鄕任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전통적 재지사족의 鄕任 기피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營將事目 발표 이듬해부터 확인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대체로 17세기 중엽이후부터는 新鄕 세력의 향안 입록 시도가 도모되는데,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향안 운영에 있어 주도 세력의 변화가 나타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해김씨는 임진왜란 이후 첫 번째 입록이 이루어진 萬曆辛丑(1601)春의 幼學 金克楷부터 확인된다. 金克楷의 경우 府使를 역임한 부친 때에 밀양에 移居하여 정착하는데, 먼저 정착한 밀양의 명문사족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본인 때부터 향안에 입록될 수가 있었다. 他貫 출신의 사족이 밀양에 정착하여 향안에 입록되는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새롭게 입록이 이루어진 이상의 가문 이외 일직손씨는 17세기에 들어서 입록자의 수가 급증됨이 주목된다.
한편, 17세기에 들어서 향안 입록에서 배제된 가문도 확인된다. 밀성변씨, 풍주노씨, 흥해최씨, 선산김씨, 서흥김씨, 순천박씨, 김해배씨, 진양강씨, 창녕성씨, 경주이씨, 대구광역시박씨, 파평윤씨, 능성구씨, 초계정씨가 이에 속한다. 이들 가문은 國初以來鄕先生案과 嘉靖甲辰以來鄕員에서도 5명 미만을 입록시켰던 가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族勢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17세기 이후에도 더 이상 밀양 내에서의 族勢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향안 입록에서 배제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조선전기 일대의 문장을 주도하며 고관을 역임했던 변중량 형제 가문이 17세기 이후 향권 운영에서 배제됨이 주목된다. 한편 여주민씨의 경우 嘉靖甲辰以來鄕員에서 18명을 입록시켰으나, 17세기 이후에는 康熙己酉(1669)春에 입록된 幼學 閔孝先 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밀양은 임진왜란 당시 적의 근거지와 가까운 관계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고을이다. 그 가운데 倡義를 통해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대응한 가문도 있지만, 직접적 피해로 전란 이후 밀양에서의 족세를 이어가지 못한 가문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17세기 향안 입록에서 배제된 가문의 상당수가 전란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16세기 중반 이전까지 향안 참여 姓貫은 10개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토성의 비중이 높음이 확인된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他貫 재지사족의 밀양 정착이 급증하면서 34개 성관으로 대폭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참여 성관이 31개로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 16세기의 경우 입록자가 1명뿐이어서 향권 주도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姓貫이 7개인데 반해, 17세기에 접어들면 1명의 입록자를 가지는 姓貫이 12개로 증가함이 나타난다. 밀양에 있어서의 향권 추이가 특정 가문으로 귀결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추측 할 수 있다.
한편, 향안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을 살펴 볼 때, 이전에 비해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남이 확인된다. 17세기 이후 중앙 정계의 閥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고, 붕당 간의 갈등으로 인해 南人과 北人의 官路가 차단되면서 중앙 관직 진출자의 수가 급감한 까닭도 있지만, 1654년 營將事目 시행으로 인한 鄕任의 권위 저하와 사족의 鄕任 기피 현상, 17세기 중엽 이후 나타난 新鄕의 향안 입록 시도와 갈등으로 인한 전통적 재지사족의 향안 입록 기피도 큰 이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 밀양향안 입록자 가운데 幼學의 비중이 급증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16세기 중엽에서 16세기 말까지의 鄕案 입록자를 기재한 嘉靖甲辰以來鄕員의 幼學은 171명 중 99명으로 그 비율이 60%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幼學은 전체 입록자 208명 중 165명을 차지해 그 비율이 거의 80%에 육박한다. 이것을 다시 營將事目 시행 전과 시행 후로 나누면, 1654년 이전에는 97명 중 71명이고, 1655년 이후에는 111명 중 94명으로 더욱 幼學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康熙辛未(1691)秋 入錄 기록 말미에는 癸丑(1673)에 變故가 발생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1673년에 있었던 變故가 어떠한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이 해의 향안 입록자들을 향안에 기재하지 못하였다고만 나타나 있다. 이 사건은 18년 후인 1691년 8월 初3일의 入錄撤案이 만들어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密州鄕案 말미에 기재된 撤案에는 幼學 朴宗瑗, 營將金淇, 幼學 蔣熙緖, 進士 李天榮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네 명에 대한 撤案은 鄕規에 제정되어 있는 입록 기준 미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는 1673년에 있었던 變故 이후 향안 入錄이 한 차례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1691년을 끝으로 향안 입록을 확인 할 수 없는 밀양 지역의 향론 동향과 함께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新鄕의 향권 도전으로 향촌 내 재지사족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지만, 이와 더불어 재지사족들 간에도 향권을 둘러 싼 각종 갈등이 야기되면서 鄕論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증가하게 된다. 1691년 4명에 대한 撤案 기재는 향권을 둘러 싼 어떠한 갈등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691년 끝으로 鄕案 入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떠한 사건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7세기 후반에 밀양 지역에서 노정되었던 갈등으로 인한 향론의 불일치로, 18세기 이후에는 통일된 향안의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나지만, 18세기 이후 영남 지역의 대다수 고을에서의 鄕論은 크게 분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먼저 吏族, 庶孼, 富豪에서 사족으로 성장한 이른반 新鄕들의 향권 도전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 향론이 크게 분열되었으며, 신향의 향안 입록 도모에 종전의 재지사족은 향안 운영을 기피하거나 배제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사족들 간에도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는 당색으로 인한 갈등, 가문 간의 우열 경쟁 등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複雜多岐한 갈등 요인이 밀양에서도 17세기 중엽 이후 노정되면서, 1673년의 變故와 1691년의 撤案과 같이 향안 입록을 둘러 싼 갈등이 일어났던 것이며, 18세기 이후의 향안 입록을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密州鄕案 말미에는 1691년 이후 향안의 보관과 奉審, 그리고 重修에 관한 연혁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嘉慶 13년(1808) 戊辰 5월 25일에 비로소 鄕射堂에 鄕案을 奉安하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이어 同治 9년(1870) 庚午에 제1차 奉審이 이루어졌고, 光緖 8년(1882) 壬午 9월 16일에 제2차 奉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辛亥(1911) 4월 초5일에 향안을 校正하고 重修했다고 나타나 있다. 이때 중수된 것이 바로 본 密陽鄕案이다.
密陽鄕案의 가장 마지막에는 承政院同副承旨를 역임했던 밀양 출신의 안희원이 辛亥(1911) 4월 初5일에 작성한 後識가 부기되어 있다. 後識에서는 먼저 密陽鄕案으로 2本이 있었는데, 그 중 1本은 鄕堂에 봉안하였고, 1本은 府舍에 奉安했다고 한다. 앞서 密州鄕案 말미에 향안을 鄕射堂에 봉안했다고 하는데, 그것 이외에 하나가 더 있어 관청에 보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근래에 세상이 多難해져 黌舍, 즉 향교에 향안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韓末 鄕廳 조직이 폐지됨에 따라 향안을 鄕校로 옮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향안을 비롯하여 유향소 관련 자료가 해당 고을의 향교에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2월에 향안에 대한 印頒 논의가 생겨 밀양향안의 重修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約日에 밀양의 유림들이 모여, 전해져 오던 두 개의 案을 서로 비교하고 검토하였으며, 이름 아래의 註에 대한 교정을 통해 본 밀양향안의 重修가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 後識에서 주목할 점은 밀양향안의 중수가 일제시대인 1911년에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앞서서 언급했듯이, 鄕論의 불일치로 밀양에서의 향안 입록은 18세기 이후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여기에는 기존 재지사족과 新鄕과의 갈등, 당색 및 가문 간 우열 경쟁으로 인한 갈등 등 複雜多岐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한말 신분제와 향청의 폐지, 그리고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다. 즉 1911년의 향안 중수에 있어서 위와 같은 문제로 발생했던 향촌 내 주도권 갈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先祖들에 의해 이루어진 향안 작성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一鄕 선배들을 追崇하고, 一鄕 유림들 간에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향안 중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경상도密陽府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과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지방자치 기구인 留鄕所 및 鄕廳 구성원들의 명부로, 입록자의 성격은 시기별로 차이가 나타난다. 경상도의 大邑이었던 밀양에서는 1544년 이전에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으며, 당대의 명망 있는 지역 출신의 인사들이 기재되었었다. 이러한 향안의 작성은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는 재지사족 주도 하에 배타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재지사족들은 향안을 바탕으로 지역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庶孼, 富豪, 吏族에서 성장한 新鄕 세력을 배제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이후 향촌 내의 複雜多岐한 갈등이 노정되면서 향안 입록이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7세 중반 향안 권위의 약화, 新鄕 세력의 도전과 갈등, 당색 및 가문 간 갈등의 문제는 鄕論의 통일을 저해하였고, 향안 운영이 파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본 밀양향안의 시기별 입록 추이를 통해 살펴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