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삼가현玉溪洞에서 결성된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884년에 작성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상도三嘉縣玉溪洞 일대에서 실시되었던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이다. 1870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정리된 동안을 엮은 것으로, 「玉溪洞案」이란 제목으로 成冊되었다. 옥계정계가 실시되었던 삼가현은 현재 경상남도합천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이곳은 1980년대 초반까지 합천군봉산면노파2구사창마을이었는데,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지금은 고삼리에 편입되었다. 옥계정계의 원래 명칭은 옥계동계였으나 옥계동에 玉溪亭이 설립된 이후로 옥계정계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옥계정계 관련 자료로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1704), 「洞案 己亥年修正」(1719), 「洞案」(1685~1701), 「洞案 新案」(1685~1766), 「洞案」(1735~1765), 「玉溪洞先案」(1786), 「玉溪洞先案」(1816), 「玉溪洞案」(1741~1798), 「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1955~1980), 「玉溪亭契案」(1978) 「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있다.
「옥계동안」은 크게 玉溪大洞先案과 玉溪大洞時案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870년에 만들어진 옥계대동선안에는 모두 52명이 기재되어 있다. 1978년에 간행된 「옥계정계안」을 통해 여기에 기재된 인물들의 생몰연대를 살펴보면, 19세기 전후해서 옥계정계에서 활동했던 계원들을 기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안 가장 마지막에 기록 일자와 더불어 ‘補遺’라고 기재한 것으로 보아, 전해져 내려오는 다른 동안을 보완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재 인물들의 생몰연대를 확인해보면, 「玉溪洞先案」(1816)에 수록되어 있는 玉溪洞新案 기재 인물들의 활동 시기와 비슷하다. 옥계동신안은 1816년 당시의 옥계정계 계원을 망라하는 자료인데, 옥계대동선안 기재 인물 중 옥계동신안에 기재된 인물은 단 한명도 없다. 이들이 누락된 연유는 다른 자료가 없어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세기 전후해서 일어난 향촌 내 갈등으로 당시 동안 입록에서 배제되었을 경우, 또는 19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동안이 작성될 때 선조들을 소급하여 입록했는 경우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이다.
옥계대동선안의 성씨별 본포를 보면 崔氏 24명, 金씨・慶씨・李씨 각 6명, 朴씨 5명, 魚씨 4명, 許씨 1명이다. 최씨 즉, 慶州崔氏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옥계정계에 경주최씨의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전까지 작성된 동안과 「옥계동안」을 통해 옥계정계를 주도했던 것으로 보이는 경주최씨와 咸從魚氏 두 가문의 입록 비율을 살펴보면, 18세기 이후 비중이 점차 경주최씨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나타나며 옥계대동선안에서 그 차이가 확연해진다. 옥계정계 내에서의 함종어씨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계대동시안은 옥계대동선안이 만들어지던 1870년과 1884년에 작성된 두 가지가 있다. 1870년의 時案은 옥계대동선안 작성 당시에 옥계정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계원 전원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1870년 시안 작성 당시 契任은 班首에 金基澤・崔惟允・魚丙愚, 公員에 崔惟善, 有司에 魚守愚・金基鉉으로 나타나 있다. 契務를 총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계의 우두머리 명칭이 이전까지는 座上이었으나, 본 동안에서는 반수로 호칭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공원은 이전의 公事員을 줄인 호칭으로 보인다. 1870년 시안에는 모두 132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성씨별로는 최씨 52명, 어씨 27명, 김씨・경씨 각 14명, 박씨 11명, 이씨 7명, 吳씨 3명, 柳씨・成씨 각 2명이다.
1884년의 시안은 1870년 시안 작성 이후 옥계정계에 입록한 이들을 추가 기재한 것이다. 본 자료의 성책은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84년 시안 작성 당시 계임은 반수 崔秉洛・魚潜愚・朴任淳, 公司員 魚致泓, 유사 崔秉憲・朴景源이다. 여기에는 모두 35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성씨별로는 최씨 15명, 박씨 8명, 어씨 5명, 경씨・宋씨・허씨 각 2명, 류씨 1명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전에 작성된 동안과 비교했을 때, 옥계정계 내에서 경주최씨의 비중이 상당이 높아지고 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함종어씨의 비중이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를 기점으로 옥계정계 주도권이 경주최씨 가문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각 고을의 洞里 별로 널리 시행되었던 洞契의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의 경우 각 동리를 대표하는 사족들의 주도하에, 사족들 간의 결속력 강화와 하층민 통제라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는데, 玉溪亭契도 당시의 경상도삼가현옥계동 일대에 거주하는 사족들이 향촌 지배질서 강화의 수단으로 결성한 것이다. 이전에 옥계정계에서 작성하였던 동안과 본 동안의 구성원 수를 비교해보면 경주최씨 가문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음이 나타난다. 옥계정계 운영 주도권에 있어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陜川댐水沒誌』, 慶尙南道, 慶尙南道, 1988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