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삼가현玉溪洞에서 결성된 玉溪亭契의 역대 계원 명부로, 1786년에 만들어진 「玉溪洞先案」과 1816년에 만들어진 「玉溪洞新案」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상도三嘉縣玉溪洞 일대에서 실시되었던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786년에 만들어진 「玉溪洞先案」과 1816년에 만들어진 「玉溪洞新案」을 합친 것이다. 옥계정계가 실시되었던 삼가현은 현재 경상남도합천군에 편입된 곳이다. 이 지역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합천군봉산면노파2구사창마을이었다가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금은 고삼리에 편입되어 있다. 옥계정계의 원래 명칭은 옥계동계였다. 하지만 옥계동에 玉溪亭이 설립된 이후로 옥계정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옥계정계 관련 자료로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1704), 「洞案 己亥年修正」(1719), 「洞案」(1685~1701), 「洞案 新案」(1685~1766), 「洞案」(1735~1765), 「玉溪洞先案」(1786), 「玉溪洞案」(1741~1798), 「玉溪洞案」(1884), 「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1955~1980), 「玉溪亭契案」(1978), 「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있다.
본 「玉溪洞先案」은 先案과 時案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안의 경우 1786년에 작성된 「옥계동선안」의 제2책에 해당된다. 1786년의 「옥계동선안」은 17세기 중반부터 1741년까지 옥계정계 계원으로 입록된 자들을 망라하고 있는데, 본 「옥계동선안」에서는 이를 이어 1746년인 丙寅 10월 29일부터 1765년인 乙酉 2월 25일까지 입록된 자들을 정리해 놓고 있다. 선안 작성 당시의 계임은 좌상 魚長連・崔南老・金萬光, 공사원 金萬澤, 유사 曺姬謨로 手決과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1786년의 「옥계동선안」과 동일한 구성원이다.
선안에 기재되어 있는 자들은 「동안 신안」(1685~1766)의 기재인물과 중복된다. 그런데 본 「옥계동선안」은 1786년의 「옥계동선안」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동안처럼 칼로 이름을 도려낸 削名 흔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앞선 시기의 동안의 경우 특정 성씨와 계파의 이름을 삭명한 흔적이 남아 있거나, 동시대를 다루는 복수의 동안이 제작되었었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중반이후 동계 운영과 관련된 향촌 내 갈등이 노정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옥계동선안」이 작성되는 1786년 무렵에는 향촌 내 갈등이 어느 정도 무마된 다음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안과 「동안 신안」(1685~1766)의 중복시기에 입록된 인물들을 비교해보면, 「동안 신안」에서 삭명된 자들이 거의 선안에 입록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선안에 기재된 28명 중 18명은 「동안 신안」에서 확인되는데, 중요한 것은 「동안 신안」에서 삭명된 것으로 여겨지는 45명이 누구인지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안 신안」의 삭명 흔적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18세기 전반까지 삭명된 인물들은 「옥계동선안」을 통해 누구인지 대부분 추정이 가능하나, 중반이후의 인물들은 본 선안에도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작성되었던 동안에서 삭명된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옥계동선안」과 1978년에 간행된 「옥계정계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삭명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18세기 중반 동안의 삭명 인물들은 본 선안과 「옥계정계안」에서 확인 할 수가 없다. 당시 향촌 내 갈등이 18세기 중반의 특정한 성씨와 계파가 옥계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한편, 신안은 1816년 당대 옥계정계 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을 모두 기록한 것이다. 모두 107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성씨별로는 崔씨 41명, 魚씨 21명, 金씨 18명, 慶씨 9명, 朴씨 8명, 李씨 5명이며, 그 외 吳씨・曺씨・鄭씨・柳・成씨가 확인된다. 1978년에 간행된 「옥계정계안」을 통해 이들의 본관을 확인해보면, 옥계정계를 慶州崔氏, 咸從魚氏, 義城金氏, 淸州慶氏 등이 주도했음이 나타난다. 다만 이전과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옥계정계를 대표하던 양 가문인 경주최씨와 함종어씨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경주최씨에게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옥계정계 내 경주최씨의 비중이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안 작성 당시 계임은 공사원 金象九, 유사 朴致斗・崔擎岳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재지사족들의 향촌 내 지배질서 체제 강화와 신분 간 또는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시행하였던 洞契의 시행 추이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玉溪亭契 역시 조선후기 경상도삼가현옥계동 일대에서 시행되었던 동계로, 본 자료에서는 18세기 후반 옥계동계 운영을 주도했던 가문과 동안 입록과 관련된 향촌 내 갈등 양상의 일면목을 살펴 볼 수가 있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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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