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삼가현玉溪洞에서 결성된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741년부터 1798년까지 기록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상도三嘉縣玉溪洞 일대에서 시행되었던 동계인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이다. 먼저 1741년부터 1766년까지의 계원 명단을 정리한 후, 1783년부터 1798년까지 새롭게 가입한 계원을 추록한 것이다. 삼가현은 현재의 경상남도합천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조선후기에 동계가 실시되었던 합천군봉산면노파2구사창마을은 현재 합천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지금의 고삼리에 편입되었다. 옥계정계는 17세기 무렵 수몰 직전의 노파2구 일대에 거주하던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洞契이다. 처음 계의 명칭은 옥계동계였는데, 옥계동에 玉溪亭이 설립되면서 옥계정계로 불리기 시작했다. 옥계정계 관련 자료로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1704), 「洞案 己亥年修正」(1719), 「洞案」(1685~1701), 「洞案 新案」(1685~1766), 「洞案」(1735~1765), 「玉溪洞先案」(1786), 「玉溪洞先案」(1816), 「玉溪洞案」(1884), 「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1955~1980), 「玉溪亭契案」(1978), 「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있다.
본 동안은 1783년인 癸卯 10월 25일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것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계묘 10월 25일 이전 것은 1741년인 辛酉 2월 29일부터 1766년인 丙戌 10월 24일까지이다. 이 부분은 함께 소장되어 있는 「洞案 新案」(1685~1766) 및 「洞案」(1735~1765)과 동일한 시기의 계원을 나타내고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세 동안을 비교해보면, 기재되어 있는 인적 구성 면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본 동안에서의 신유 2월 29일~병술 10월 24일까지의 누적 기재 인원은 모두 50명이다. 그런데 이중 「동안」(1735~1765)에 기재된 인물과 일치하는 이름은 26명밖에 되지 않으며, 「동안 신안」(1685~1766)과 일치하는 이름은 불과 4명밖에 없다. 그런데 본 동안에 기재된 인물은 1978년에 간행된 「玉溪亭契案」을 검토해보면, 「동안」과 「동안 신안」에서는 削名되어 확인되지 않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확인된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으나, 「옥계동안」은 18세기이후 옥계정계 운영과 관련해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촌 내 갈등으로 당시 삭명되었던 인물만 별도로 작성한 동안일 가능성이 높다.
1783년인 계묘 10월 25일부터 1798년인 聖上 22년 무오(戊午) 12월 30일까지는 추록되는 형식으로 새로 입록한 계원의 명부가 기재되어 있다. 9회에 걸쳐 추록되었으며, 추록 일자 뒤에는 당시 계임의 이름과 手決이 남아 있다. 모두 71명이 추록되었으며, 성씨별로는 魚씨와 崔씨가 각 20명, 慶씨와 金씨 각 6명, 朴 5명, 柳씨와 李씨 각 4명, 성(成)씨와 孫씨 각 2명, 鄭씨와 曺씨 각 1명으로 나타난다. 추록된 계원들의 성씨의 비중과 1978년에 간행된 「옥계정계안」의 성씨 및 본관 분포를 살펴보면, 당시 옥계정계를 주도하고 있던 가문은 慶州崔氏와 咸從魚氏 양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입록 일자 아래에 기재되어 있는 당시 계임들의 성씨 분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洞里 별로 널리 시행하였던 洞契의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7~18세기에 접어들면, 재지사족들은 향촌 내 지배질서 체제 강화와 신분 간 또는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동계 운영을 주도하게 되는데, 옥계정계 역시 그러한 시대적 추세에 따라 결성된 조직이다. 본 자료에는 1741년부터 1798까지 옥계정계에 입록된 계원들의 이름을 기재해 놓아, 당시 옥계정계 운영을 주도하던 세력을 짐작 할 수 있게 해준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陜川댐水沒誌』, 慶尙南道, 慶尙南道, 1988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