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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옥계정계(玉契亭契)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Z.1775.4889-20100731.Y10426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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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옥계정계
작성지역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고삼리
작성시기 1775
형태사항 크기: 30.6 X 19.9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23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안내정보

1775년 옥계정계(玉契亭契) 동안(洞案)
지금은 합천댐 건설로 수몰된 경상남도합천군옥계동(玉契洞) 일대에서 시행되었던 동계(洞契)의 계원 명부이다. 1735년부터 1766년까지 옥계정계에 새롭게 가입한 계원의 이름을 기재해 놓았다. 옥계정계는 양반층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동계로, 조선후기 옥계동 일대 양반들의 결속력 강화와 동계 조직을 이용한 하층민 통제를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동안에 기재된 인물은 모두 44명인데, 함종어씨(咸從魚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두 가문이 옥계정계를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우

상세정보

경상도삼가현玉溪洞에서 결성된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685년부터 1766년까지 기록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상도三嘉縣玉溪洞 일대에서 실시되었던 玉溪亭契의 계원 명부이다. 옥계정계는 일종의 洞契에 속한다. 본 동안에는 1735년부터 1766년까지 새롭게 가입된 계원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1775년인 乙未 10월 23일에 수정되어 새롭게 엮어 놓은 것이다. 1735년인 乙卯 3월 초3일의 崔應參부터 확인되나, 成冊의 앞부분이 손실되었고 표지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느 시기의 인물부터 기재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옥계정계가 실시되었던 삼가현은 현재 경상남도합천군에 편입된 지역으로, 1980년대 초반 합천군봉산면노파2구사창마을로 있다가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곳이다. 지금은 고삼리에 편입되어 있다. 옥계정계는 17세기 무렵 수몰 직전의 노파2구 일대에 거주하던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는데, 원래 계의 명칭은 옥계동계였으나 옥계동玉溪亭이 설립된 이후로 옥계정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옥계정계 관련 자료로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1704), 「洞案 己亥年修正」(1719), 「洞案」(1685~1701), 「洞案 新案」(1685~1766), 「玉溪洞先案」(1786), 「玉溪洞先案」(1816), 「玉溪洞案」(1741~1798), 「玉溪洞案」(1884), 「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1955~1980), 「玉溪亭契案」(1978), 「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있다.
본 동안에서 확인되는 계원은 모두 44명으로 1735년 을묘부터 1766년 병술까지 15회에 걸쳐 입록되었다. 성씨별로는 魚씨 16명, 崔씨 10명, 金씨 5명, 柳씨 4명, 李씨와 曺씨 각 3명, 鄭씨 2명, 朴씨 1명이다. 옥계정계 관련 다른 동안과 마찬가지로 옥계정계를 주도하던 가문은 咸從魚氏와 慶州崔氏 두 가문임을 알 수가 있다. 동안 마지막에는 동안을 수정한 일자와 더불어 임원이었던 座上 최씨, 公事員 慶씨, 有司 류씨와 최씨의 手決이 남아 있다.
한편 본 동안에서 칼로 이름을 도려내어 삭명한 곳은 모두 서른한 군데에서 확인 된다. 1786년 「옥계동선안」과 1978년 「옥계정계안」에는 본 동안에서 삭명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삭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인물들은 18세기 중반 이전의 옥계정계 명부 관련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淸州慶氏와 義城金氏 金克敏(1591~1670)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 향촌 내 갈등으로 특정 성씨와 계파가 동계 운영에서 배제된 경우로 추정이 되는데, 이때의 갈등으로 앞서 수록된 인물들과 그 선조들까지 소급되어 삭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안 작성 당시 공사원으로 있으면서 수결까지 남긴 경씨의 경우 본 동안에서 한 명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갈등 상황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1775년에 수정해서 엮은 본 동안의 입록시기인 1735~1766년은 「洞案 新案」(1685~1766)의 입록시기와 상당 부분이 겹친다. 하지만 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두 동안에 동시에 기재되어 있는 인물은 19명에 불과하다. 본 동안에 기재된 25명은 「동안 신안」에서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반면 같은 시기 「동안 신안」에 기재된 인물도 본 동안과 중복되는 비율은 절반 이하이다. 당시의 사정을 살펴 볼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없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상황은 본 동안의 작성 전후로 해서, 또 다른 향촌 내 갈등이 노정되고 있었음을 추정 할 수 있게 해준다. 두 동안의 기재인물 수의 차이가 아니라, 기재 인물 자체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복수의 세력에 의해 동안이 별도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동계는 각 동리를 대표하는 사족들의 주도하에, 사족들 간의 결속력 강화와 하층민 통제라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동계의 운영은 조선후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강화 수단이었던 것이다. 玉溪亭契 역시 사족들이 향촌 지배질서 강화의 수단으로 결성한 동계이다. 본 동안에는 1735년부터 1766년까지의 옥계정계 계원 명부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 옥계동 일대를 둘러싼 향권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陜川댐水沒誌』, 慶尙南道, 慶尙南道, 1988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75년 옥계정계(玉契亭契) 동안(洞案)
崔應參

乙卯三月初三日
崔貞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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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錫麟

丙辰四月初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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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泰寅
李世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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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虎大

辛酉二月二十九日
魚長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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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錫猉
鄭天僑
魚從演
魚錫點
崔俊立
金光五
柳命煒

丙寅十月二十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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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十月二十九日
魚錫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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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日柱

戊辰十月初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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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錫龍
魚成演
崔南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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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重演
魚用華
崔宗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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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命樞

癸酉十一月二十九日
金秀元

丁丑十一月十八日
李世春
魚錫凰
魚世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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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命燦

戊寅十月二十四日
李世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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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廷柱

庚辰十月二十四日
鄭元僑

辛巳十月二十四日
金興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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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十月初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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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姬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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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錫泳
魚用南

甲申十月二十二日
朴雨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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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澤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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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得演
曹學周
崔元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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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郁
崔任大
柳陽一

乙酉二月二十五日
金尙鎔

丙戌十月二十四日
乙未十月二十三日改修正
座上崔[署押]
公事員慶[署押]
有司柳[署押]
崔[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