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삼가현옥계동(玉溪洞)에서 결성된 옥계정계(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704년에 기록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경상도삼가현(三嘉縣)옥계동(玉溪洞) 일대에서 결성된 동계 조직 옥계정계(玉溪亭契)의 계원 명부로 1704년에 작성된 것이다. 삼가현은 현재 경상남도합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동계가 실시되었던 합천군봉산면노파2구사창마을은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지역이다. 현재는 고삼리에 편입된 곳이다. 옥계정계는 17세기 무렵 수몰 직전의 노파2구 일대에 거주하던 사족들에 의해 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계의 명칭은 옥계동계였으나, 계원들이 옥계정(玉溪亭)을 설립한 이후로 명칭을 옥계정계로 변경하였다. 현재 수몰로 옮겨진 옥계정에는 옥계정계 관련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계안이다. 관련 자료로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동안 기해년수정(洞案 己亥年修正)」(1719), 「동안(洞案)」(1685~1701), 「동안 신안(洞案 新案)」(1685~1766), 「동안(洞案)」(1735~1765), 「옥계동선안(玉溪洞先案)」(1786), 「옥계동선안(玉溪洞先案)」(1816), 「옥계동안(玉溪洞案)」(1798), 「옥계동안(玉溪洞案)」(1884), 「옥계정속계명안 을미11월(玉溪亭續契名案 乙未十一月)」(1954~1978), 「옥계정계안(玉溪亭契案)」(1978), 「옥계동내부조절목(玉溪洞內扶助節目)」(1774)이 있다.
본 자료는 「동안 갑신2월19일수정(洞案 甲申二月十九日修正)」으로 17세기 옥계동계의 계원 명부이다. 그러나 본 자료에 표지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제목은 알 수가 없다. 모두 34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계의 임원과 해당 임원의 수결(手決)이 기재되어 있다. 수록된 34명 이외에 14곳에서 칼로 도려낸 삭명(削名) 흔적이 나타난다. 삭명은 동안이 작성된 갑신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786년 「옥계동선안」과 1978년 「옥계정계안」에는 갑신년 수정 동안의 수록자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본 자료에서 삭명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확인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삭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인물들은 18세기 중반 이전의 옥계정계 명부 관련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청주경씨(淸州慶氏)와 의성김씨(義城金氏) 김극민(金克敏, 1591~1670)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8세기 중반 무렵 향촌 내 갈등으로 특정 성씨와 계파가 동계 운영에서 배제되었을 경우, 늦게 참여한 특정 성씨와 계파가 후기에 정비되는 동안(洞案)에 선조들을 추록했을 경우로 추정할 수 있는데 전자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아 보인다. 즉 삭명된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선조까지 소급되어 삭명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한편 본 동안의 작성 시기는 1704년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갑신2월19일수정’이라는 문구와 가장 마지막에 기재된 동유사(洞有司) 최경신(崔慶新, 1652~1715)의 생몰연대를 볼 때, 갑신년은 1704년이 유력하다. ‘수정’이라는 것은 어떠한 연유로 인해 선대의 계원을 새롭게 정비한 동안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안의 명단에는 ‘~이상’의 의미인 ‘제(際)’가 두 번 나타난다. 먼저 것은 송지해(宋之楷)와 송지소(宋之橚) 사이에, 뒤의 것은 날짜와 임원 명단 앞에 기재되어 있다. 이를 기점으로 동안을 나누면 앞에는 20명의 이름과 13곳의 삭명을, 뒤에는 14명의 이름과 1곳의 삭명을 확인 할 수 있다. 전자에 기재된 인물은 대체로 17세기 초중반에 활약했던 인물로 최초 옥계정계가 결성될 당시의 인물로 추정된다. 「옥계정계안」에 수록된 20세기 후반의 계원 명단 아래에는 세주로 누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는데, 해당 선조가 되는 함종어씨(咸從魚氏)의 어화곤(魚化鯤), 창녕조씨(昌寧曹氏)의 조경덕(曹敬德), 안동권씨(安東權氏)의 권극찬(權克纘),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송정렴(宋挺濂)은 모두 본 동안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선조인 최경문(崔慶文)은 본 동안 말미에 기재된 임원 명단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의성김씨의 선조인 김극민은 본 동안에서 이름이 삭명된 자로 추정된다. 비록 17세기 중엽에 작성된 동안이 없어 확신 할 수 없으나, 본 동안 앞부분에 기재된 20명은 옥계정계 계원들이 현조(顯祖)로 삼고 있는 인물들로, 17세기 중엽 최초 동계 결성 당시 활약했던 자들을 일종의 선안(先案)처럼 엮은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한편 동안 뒷부분에 기재된 13명은 생몰연도를 볼 때, 17세기말~18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로 실제 본 동안 작성 당시의 계원으로 여겨진다.
본 동안에 기재된 34명과 임원 5명의 성씨와 본관을 「옥계정계안」을 통해 살펴보면, 함종어씨 8명, 경주최씨 6명, 밀양박씨(密陽朴氏) 5명, 은진송씨 5명, 안동권씨 4명, 성산전씨(星山全氏) 4명, 창녕조씨(昌寧曹氏) 1명이며, 그밖에 정확한 본관을 확인 할 수 없는 문(文)씨 2명, 안(安)․이(李)․류(柳)․김(金)씨가 각각 1명씩 나타난다. 여기에 기재된 인물들의 후손은 20세기 후반까지 옥계동 일대에 세거(世居)하며 옥계정계의 구성원으로 동계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 본 동안 작성당시의 임원으로는 좌상(座上)에 송정한(宋挺漢)․최경문․어익한(魚翼漢) 3명이며, 공사원(公事員)은 송지상(宋之相), 동유사는 최경신이다. 좌상의 경우 계무(契務)를 총괄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공사원과 동유사는 실질적 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에 동리(洞里) 별로 널리 시행되었던 동계(洞契)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7~18세기에 접어들면, 재지사족들은 향촌 내 지배질서 체제 강화와 신분 간 또는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동계 운영을 주도하게 되는데, 옥계정계 역시 그러한 시대적 추이에 따라 결성되었다. 한편, 본 동안에는 17세기 중엽 옥계정계가 결성될 당시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어, 본 동계의 유구성을 확인 할 수 있다.
『鳳山鄕誌』, 박문목, 慶尙南道 陜川郡 鳳山面,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陜川댐水沒誌』, 慶尙南道, 慶尙南道, 1988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