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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곽종석(郭鍾錫) 용호유계서(龍湖儒契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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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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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곽종석, 용호유계
작성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작성시기 1900
형태사항 크기: 29.6 X 19
판본: 연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177권 63책
판식: 半郭 : 15.8x21.4㎝, 四周單邊, 有界, 12行28字, 上向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1900년 곽종석(郭鍾錫) 용호유계서(龍湖儒契序)
지금의 경상남도합천군에서 결성된 용호유계(龍湖儒契)의 서문으로 1900거창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이 작성하였다. 당시는 신분제가 폐지되고, 외세에 의해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와 기존의 양반이 중심의 된 기존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체제가 무너져가고 있던 시기였다. 서문은 용호유계의 계원들이 성리학의 정신을 서로 힘써, 당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바탕이 되어 주기를 당부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리학적 정신과 명분의 회복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위정척사(衛正斥邪) 계열 유학자들의 현실 인식이 나타나 있는 자료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한말, 외래문물이 밀려오는 가운데 성리학적 질서와 정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경상남도합천용호(龍湖)에서 결성된 용호유계(龍湖儒契)의 서문으로, 곽종석(郭鍾錫)1900년에 작성
俛宇先生文集 四十七俛宇先生文集 卷之百三十四 序 龍湖儒契序 庚子俛宇先生文集 卷之百三十四 一
一 : 目錄卷1, 目錄卷2 二 : 目錄卷3, 目錄卷4, 續目錄 一 : 卷首 䟽․箚․日記․辭狀 二 : 卷1 賦․操․詩, 卷2 詩, 卷3 詩 三 : 卷4 詩, 卷5 詩, 卷6 詩 四 : 卷7 詩, 卷8 詩, 卷9 詩 五 : 卷10 書, 卷11 書 六 : 卷12 書, 卷13 書, 卷14 書 七 : 卷15 書, 卷16 書, 卷17 書 八 : 卷18 書, 卷19 書, 卷20 書 九 : 卷21 書, 卷22 書, 卷23 書 十 : 卷24 書, 卷25 書, 卷26 書 十一 : 卷27 書, 卷28 書, 卷29 書 十二 : 卷30 書, 卷31 書, 卷32 書 十三 : 卷33 書, 卷34 書, 卷35 書 十四 : 卷36 書, 卷37 書, 卷38 書 十五 : 卷39 書, 卷40 書, 卷41 書 十六 : 卷42 書, 卷43 書, 卷44 書 十七 : 卷45 書, 卷46 書, 卷47 書 十八 : 卷48 書, 卷49 書, 卷50 書 十九 : 卷51 書, 卷52 書, 卷53 書, 卷54 書 二十 : 卷55 書, 卷56 書, 卷57 書 二十一 : 卷58 書, 卷59 書, 卷60 書 二十二 : 卷61 書, 卷62 書, 卷63 書 二十三 : 卷64 書, 卷65 書, 卷66 書 二十四 : 卷67 書, 卷68 書 二十五 : 卷69 書, 卷70 書 二十六 : 卷71 書, 卷72 書, 卷73 書 二十七 : 卷74 書, 卷75 書, 卷76 書 二十八 : 卷77 書, 卷78 書, 卷79 書 二十九 : 卷80 書, 卷81 書, 卷82 書 三十 : 卷83 書, 卷84 書, 卷85 書 三十一 : 卷86 書, 卷87 書, 卷88 書 三十二 : 卷89 書, 卷90 書, 卷91 書 三十三 : 卷92 書, 卷93 書, 卷94 書 三十四 : 卷95 書, 卷96 書, 卷97 書 三十五 : 卷98 書, 卷99 書, 卷100 書 三十六 : 卷101 書, 卷102 書, 卷103 書 三十七 : 卷104 書, 卷105 書 三十八 : 卷106 書, 卷107 書, 卷108 書 三十九 : 卷109 書, 卷110 書, 卷111 書 四十 : 卷112 書, 卷113 書, 卷114 書 四十一 : 卷115 書, 卷116 書, 卷117 書 四十二 : 卷118 書, 卷119 書, 卷120 書 四十三 : 卷121 書, 卷122 書, 卷123 書 四十四 : 卷124 書, 卷125 書, 卷126 書, 卷127 書 四十五 : 卷128 雜著, 卷129 雜著 四十六 : 卷130 雜著, 卷131 雜著, 卷132 雜著 四十七 : 卷133 序, 卷134 序, 卷135 序 四十八 : 卷136 序, 卷137 記, 卷138 記 四十九 : 卷139 記, 卷140 記, 卷141 跋 五十 : 卷142 跋, 卷143 銘, 卷144 箴․贊․頌․昏啓․上樑文 五十一 : 卷145 祝文․祭文, 卷146 祭文․哀辭, 卷147 碑 五十二 : 卷148 碑, 卷149․墓誌銘 碑, 卷150 墓誌銘 五十三 : 卷151 墓誌銘․壙誌, 卷152 墓表, 卷153 墓表 五十四 : 卷154 墓表, 卷155 墓碣銘, 卷156 墓碣銘 五十五 : 卷157 墓碣銘, 卷158 墓碣銘, 卷159 墓碣銘 五十六 : 卷160 墓碣銘, 卷161 墓碣銘, 卷162 行狀 五十七 : 卷163 行狀, 卷164 行狀․遺事․傳 五十八 : 續卷1 詩․書, 續卷2 書, 續卷3 書 五十九 : 續卷4 書, 續卷5 書, 續卷6 書 六十 : 續卷7 書, 續卷8 書, 續卷9 書 六十一 : 續卷10 書, 續卷11 書, 續卷12 書․雜著․序․記․跋․銘․祝文
[내용 및 특징]
합천 일대에서 실시된 용호유계(龍湖儒契)의 서문이다. 서문은 1900년에 거창(居昌)의 유학자였던 곽종석(郭鍾錫)이 작성하였다. 본 서문에는 계의 기원, 용호유계의 결성동기와 목적, 계원들을 향한 당부가 나타나 있다. 먼저 계의 기원과 용호유계의 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질제(質劑)와 부권(符券)으로 신표인 계(契)로 삼았는데, 이것은 옛적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만든 것으로 그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끼리 기사(欺詐)하니, 의심이 생겨나 계(契)를 만들게 된 것으로 이는 성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유자(儒者)들이 사람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도(道)를 배우고 인륜을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타락하고 가르침이 폐해지면서 백사(百邪)가 다투어 일어나 사람들은 더욱 의심이 많아졌다. 이에 근래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결합하여 서로 배우고 잘못을 나무라는 모임을 만드니 이것을 유계(儒契)라고 하였다. 합천(陜川) 서쪽에는 용호(龍湖)라는 곳이 있는데, 뛰어난 절경을 가진 곳으로 잠룡(潛龍)이 있을만한 곳이라 하였다. 그 중 뛰어난 한 구역을 점유하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왕왕 인재들이 출현하였다. 이에 서로 계(契)를 맺어 뜻을 같이 하고 상신(相信)할 수 있는 자들을 모아 계안(契案)과 절목(節目)을 만들어 용호유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인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는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용호유계에 대한 당부가 나타나 있다. 먼저 행동과 풍모가 일반 서민과 다르고, 높은 성예(聲譽)를 따르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무리를 선비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선비들의 계, 유계(儒契) 역시 다른 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논어(論語)』의 “너는 군자 같은 선비가 될 일이지, 소인 같은 선비는 되지 마라(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선비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군자 같은 선비는 위기(爲己)가 아닌 위인(爲人)을 위해 학문하며, 충(忠)과 신(信)으로 질제로 삼고 이(理)와 의(義)로 부권으로 삼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心之所同然者)”이라 했다. 유계에 참여한 선비들이 군자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것에 대한 바람인 것이다.
또 『주역』의 용덕(龍德)을 찬하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에 따르면, 용덕은 ‘한사존성(閑邪存誠)’하고, ‘충신진덕(忠信進德)’한 것이며, 또 이치를 밝히고 의리를 행하여 ‘지지지지 지종종지(知至至之 知終終之)’하는 것이라고 했다. 앞선 서문에서는 용호를 인재가 나올 만한 곳, 즉 잠룡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이러한 잠룡을 『주역』의 용덕 구절로 찬하고 비유하였다. 계원들이 용덕으로 서로 의리충신(義理忠信)에 힘써 유계로 인해 천하가 상신(相信)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천하에 여러 사상과 문물이 일어나 사람들을 선동하고 혹하게 하고 있다며, 용호유계의 선비들이 이를 제어하고 그 차이를 시험하여, 이것이 ‘섭공의 화룡(葉公之畵龍)’임을 밝히는데 힘써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상의 용호유계가 결성된 시기는 서문이 작성되기 1년 전인 1899 즈음이다. 곽종석의 『면우선생문집(俛宇先生文集)』 수록 서(書),「답심응장(答沈應章)」에는 1899곽종석이 용호유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심학환(沈鶴煥)합천 용호에서 계가 결성되자, 곽종석과 여러 유학자들에게 계의 이름을 자문하였고, 이에 곽종석1899에 용호유계라는 이름을 지어 답장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열강들에 의해 외래문물이 밀려오고 있었으며, 기존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체제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던 시기였다. 곽종석과 같은 위정척사(衛正斥邪) 계열 유학자는 성리학에 나타난 정신과 명분을 회복함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었다. 용호유계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합천 지역에서 결성된 계인 것이다.
[자료적 가치]
한말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衛正斥邪) 계열 유학자들의 동향과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인 곽종석(郭鍾錫)의 현실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용호유계의 서문이 작성된 시기는 열강의 침입으로 외래문물과 사상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신분제가 폐지되어 양반이 중심의 된 기존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체제가 무너져가고 있던 때였다. 당시 곽종석을 비롯한 위정척사 계열 유학자들은 그런 시대적 위기를 성리학적 정신과 명분의 회복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합천에서 결성된 용호유계에도 이러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論文集』제16집, 金鎬城, 서울교육대학, 1983
『俛宇集』, 郭鍾錫, 亞細亞文化社,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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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곽종석(郭鍾錫) 용호유계서(龍湖儒契序)
龍湖儒契序庚午【庚子

質劑符券之謂契契也者太羲氏之所造以左右合而驗異同致物於信
者也自羲而上未聞也物之咸信何庸契爲民之生稍久矣情興而志貳
物疑於欺似也於是乎爲之契焉聖人豈得己哉豈惟物哉粤大猷之作
人也聯之以師儒聚之以庠塾一其敎而齊其習四海之廣兆庶之衆而
盖莫不學同於道而行同於倫也其相信相合豈翅如質劑符券之於物
者哉自夫世降敎廢風漓而習渝也百邪競作詐僞惑誣眩幻拉雜而民
志益疑儒之徒日孤矣挽近之結合同志以相與講難責輔而命之曰儒
契者其亦不得己焉乎陝川治之西有浸曰龍湖長江之所呑吐天雲之
所徘徊鴐鵝鳧雁鮦鯉黿鼉之所相羊焉而爰有潜曰龍者云渾涵冲爽
呼納萬狀占一區之勝環而居者今徃徃多翹英秀異之才抑所謂地靈
人傑者然歟於是相與結契以樂之益求四方之志同而可相信者合之
爲案目署曰龍湖儒契且問序於余余應之曰有人於此戴岌岌而穿褒
博不伍於農工之羣斯儒乎端跽而徐趨澤貌而竦肩耀聲譽於追隨之
列斯儒乎駕輕車於譚經縱波瀾於揮翰揚揚於文苑藝林之間斯儒乎
名之爲契必有所以爲之質劑符券者矣夫子之告門人曰汝爲君子儒
無爲小人儒儒而有君子小人之分爲己爲人之不類也然則彼皆儒焉
者固不可徒據其外而信其內者爾必也忠信以爲質劑理義以爲符券
而己矣忠信者實心也而理義者又此心之所同然也易之賛龍德之盛
曰閑邪存誠曰忠信進德誠與忠信皆是心也曰知至至之所以明理也
曰知終終之所以行義也夫然後此心之實然者無毫髮疑似之不盡而
心之所同即推之天下而必有合矣故曰同聲相應同氣相求契合之謂
也然而君子之學爲己不爲人故其賛潜龍之德曰遯世无悶不見是而
无悶其立心如此故能修辭立誠聚辨居行以至乎理明義精而德無不
實斯其所謂君子儒者乎諸君子之欲聲應氣求以交勉乎理義忠信之
學其必自潜龍始乎其斯以爲龍湖儒契乎契已立矣今天下百喙爭鳴
千岐扇惑者必有以揆之而驗其差矣彼惡足以疑我也苟徒以匪農匪
工有聲譽有文藝而曰吾儒乎儒乎是葉公之畵龍也於乎諸君子其勉
之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