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전라도 일대에서 東學軍이 蜂起하자 咸平縣의 士族 尹濨學은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族戚과 故舊, 同志들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民堡 결성을 준비하는데, 이때의 민보 조직 운영과 관련된 여러 조항을 기록해 놓은 것
東湖集 卷之下東湖遺稿 卷之四 民堡條約東湖遺稿 卷之四 一
卷之上 : 序文, 卷1 詩, 卷2 序․記․跋․雜著
卷之下 : 卷3 四禮祝笏, 卷4 民堡條約․補遺, 卷5 附錄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全羅道咸平縣의 재지사족 尹濨學이 族戚과 故舊, 同志들을 외적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결성을 준비한, 民堡 조직의 운영과 관련된 諸條文이다. 민보조약의 작성 시기는 윤자학의 遺稿인 『東湖遺稿』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家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아들이 작성한 가장에는 1893년 東徒들이 봉기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윤자학은 이들을 黃巾賊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民堡의 조약문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민보조약은 1893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약에는 먼저 族戚, 故舊, 同志가 힘을 합치면 患難을 免할 수 있을 것이라는 大要를 제시해 놓고, 民堡 결성시의 거처 구분, 식량 배급, 각 執事의 分定, 행동 규범, 기타 사항 등이 나열되어 있다. 민보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內外의 구별을 정한다. 同姓과 異姓을 막론하고 여자들은 內居한다. 同姓과 異姓을 막론하고 남자들은 外居한다. 60세 이상 男丁끼리 一堂에 함께 거주시킨다. 45세 이상 男丁끼리 一堂에 함께 거주시킨다. 30세와 20세 이상 男丁끼리 一堂에 함께 거주시킨다. 10세 이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각기 內居한다. 10세 이상의 남자는 外堂에서 出宿한다. 不正한 남자와 여자는 班常을 막론하고 바깥으로 逐出하며, 용서하지 않는다. 不孝, 不悌, 不敬, 不睦하는 자는 逐出하며, 정도가 심한 자는 行法으로 처단한다. 男丁이 혹 內庭에 출입할 일이 생기면, 將所에 稟하고 출입한다. 혹 失禮를 저질러 조약을 어겼을 때에는 老少와 上下를 막론하고 將所가 엄히 杖 30대를 치고, 만약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堡外로 내쫓는다.
食黨의 分定. 60세 이상의 夫人과 10세 이상은 세 번에 걸쳐 3홉 米式으로 하고, 10세 이하는 2홉 米式으로 한다. 60세 이하의 夫人과 20세 이상까지는 세 번에 걸쳐 5홉 米式으로 하고, 15세 이하는 3홉 米式으로 한다. 60세 이상 男丁과 10세 이상은 세 번에 걸쳐 3홉 米式으로 하고, 10세 이하는 2홉 米式으로 한다. 60세 이하 男丁과 20세 이상까지는 세 번에 걸쳐 5홉 米式으로 하고, 15세 이하는 3홉 米式으로 한다. 50세 이하와 20세 이상까지의 壯丁 가운데 혹 役을 행할 경우에는 별도로 7홉 米式으로 한다. 穀子는 어떤 곡물을 막론하고 한 곳에 모두 모아 놓고 세 번 나누어 준다. 饌需는 어떤 반찬을 막론하고 한 곳에 모두 모아 놓고 세 번 나누어 준다. 鹽屬은 별도의 수를 정하지 않고 貿積해 둔다.
각 執事의 分定. 將所 都執事 1인. 副執事 4인. 公事員 10인. 頒糧有司는 10인으로 각기 100명을 담당하고, 標紙를 살핀다. 頒饌有司는 10인으로 각기 100명을 담당하고, 標紙를 살핀다. 頒糧所 擧行執事 10인. 頒饌所 擧行執事 10인. 2월 초1일부터 9월 그믐까지는 3회 배급한다. 10월 초1일부터 정월 그믐까지는 2회 배급한다. 將所의 擧行下人은 항상 10명을 둔다. 公事所의 擧行下人은 항상 5명을 둔다. 公事所는 모든 일을 將所에 稟한다. 醫藥家는 堡內에 要接한다. 工匠과 冶匠은 堡內에 要接한다. 四方에 항상 200명의 瞭察人을 둔다. 東方의 50명은 靑弁을 착용하고 앞면에 각기 姓과 字號를 표시한다. 西方의 50명은 白弁을 착용하고 앞면에 각기 姓과 字號를 표시한다. 南方의 50명은 赤弁을 착용하고 앞면에 각기 姓과 字號를 표시한다. 北方의 50명은 黑弁을 착용하고 앞면에 각기 姓과 字號를 표시한다. 글을 읽는 자는 글을 읽고, 농사짓는 자는 농사를 짓고, 役을 부담하고 있는 자는 役을 부담한다. 夫人 등은 함께 紡績에 힘써 寒煖에 대비한다. 바느질 하는 자는 바느질을 하고, 베를 짜는 자는 베를 짠다.
同姓과 異姓을 막론하고 心性이 불량하여 행동이 悖戾한 자는 許接하지 않는다. 治亂의 대에 善心과 正氣가 없는 자는 그 목숨과 자손들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患難의 때에 만약 同心으로 結黨하지 않는다면, 患難을 免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소한 무리가 혹 爭鬪를 일으키면, 公事所가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將所에 알린 다음 엄히 杖 10대를 치고 내쫓는다.
집을 짓는 것은 힘을 합쳐 서로 도우지 않으면, 빨리 지을 수가 없다. 10칸의 집을 짓거나, 혹 20칸에서 30칸의 집을 짓거나, 80칸에서 90칸의 집을 짓는 것은 地勢를 보고 정한다. 內堂은 外堂 가까이에 짓지 않으며, 外堂은 內堂 가까이에 짓지 않는다. 內堂은 서로 이웃하여 짓되, 각자 族戚의 수에 따라 이웃한다. 식구가 많은 가족은 거처를 3칸 내지 4칸 式으로 하되, 將所의 知委를 따른다. 식구가 적은 가족은 거처를 1칸 내지 2칸 式으로 하되, 將所의 知委를 따른다. 下輩의 內所는 별도로 짓는다.
戒火執事 10인은 세 번 나누어서 각 부엌을 순찰하고, 주인들에게 주의를 준다. 밤에는 돌아가며, 바깥의 賊火를 순찰한다.
이상의 民堡條約과 윤자학의 家狀을 살펴보았을 때, 동학군의 공격 시 결성되는 民堡 조직의 인원은 대략 1,000명 정도이며, 그 대상은 윤자학의 일족과 인근에 거주하며 윤자학 일족과 교유하는 사족 가문, 그들을 따르는 하층민들임을 알 수 있다. 윤자학은 일찍이 과거 시험을 포기한 후, 향촌에 은거하며 후진양성과 일족의 결속력 강화에 주력했던 인물로 이와 관련된 각종 향촌 내 자치조직에 관여하였었다. 민보 조직의 범위는 윤자학이 관여하였던 각종 향촌 내 자치조직의 구성원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료적 가치]
1893년 東學軍 蜂起 시, 전라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대응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이다. 民堡 결성을 준비한 윤자학은 19세기 후반 衛政斥邪 계열 유학자들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당시 위정척사 계열의 보수적 유학자들은 동학을 末世에 나타난 邪學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무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각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그들을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고, 義兵을 일으키거나 향촌을 방어할 자치조직을 결성하게 되는데, 尹濨學의 民堡 역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윤자학은 기존에 조직되어 있던 사족 중심의 각종 향촌 내 자치조직, 즉 族契나 學契, 洞契 등을 바탕으로 민보를 조직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東湖遺稿』, 尹滋學,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99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