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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이명호(李明怘) 중수향안서(重修鄕案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C.1603.4873-20100731.Y1042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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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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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李明怘
작성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작성시기 1603
형태사항 크기: 31 X 20.7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2권 1책
판식: 半郭 : 16.4x21.2㎝, 四周單邊, 有界, 10行20字,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1603년 이명호(李明怘) 중수향안서(重修鄕案序)
1603경상도함안 출신의 이명호(李明怘)가 작성한 함안향안(咸安鄕案)의 서문(序文)이다. 향안(鄕案)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의 자치기구로 설치된 유향소(留鄕所)와 향청(鄕廳) 구성원의 명부로, 고을 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반들이 기재되어 있다. 이명호의 서문에는 그간 함안에서 향안이 작성되던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함안에서 향안은 늦어도 16세기 초반에 만들어졌으며, 한 차례의 화재를 겪은 뒤, 박덕손(朴德孫)조응경(趙應卿) 등에 의해 복구되었다. 또 1572년에는 조정언(趙庭彦)조성(趙城)에 의해 크게 개편이 되었는데, 이때에는 중국에서 보급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과 의례가 향안 조직의 규범으로 적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함안향안은 한 차례 더 소실되고 마는데, 이때에도 함안 출신의 대표적인 양반인 이정(李瀞)박제인(朴齊仁)이기(李蘷) 등이 참여하여 향안 복구를 시도했고, 전란이 끝난 후 새로운 향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광우

상세정보

1603경상도함안군에서 重修된 鄕案의 序文으로 李明怘가 작성
序, 目錄, 卷1 詩・序・祝文・祭文・雜著・碑銘, 卷2 附錄
[내용 및 특징]
조선중기 경상도함안군에서 重修된 鄕案의 序文으로, 1603함안 출신의 유학자 李明怘가 작성하였다. 원래 향안은 재지사족들의 자치운영 조직인 留鄕所 品官의 명단으로, 당대 지역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재지사족들이 입록되었다. 경상도함안에서 향안이 작성된 것은 조선전기부터이다. 현재 함안향안은 『咸州鄕案』이란 제목으로 1939년과 1996년에 만들어진 것이 전해지고 있다. 중수된 함안향안의 서문에서 향안이 중수되는 전말과 당시 함안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확인 할 수 있다.
먼저 서문에는 함안이 과거 五伽倻의 한 지역이며, 方丈洛東江이 띠를 두르고 있는 형지여서 신령한 기운 때문에 옛날부터 많은 將相들이 배출되었다며 지역의 유구성을 자부하고 있다. 실제 함안 지역은 고대 阿羅伽倻가 있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지리산낙동강 사이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한 편으로 고려시대부터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이어 당시 함안지역을 대표하던 大姓 가문과 望族들을 열거하고 있다. 열거된 성씨로는 咸安趙氏・載寧李氏・星州李氏・驪州李氏・仁川李氏・咸安李氏・順興安氏・廣州安氏・咸從魚氏・善山金氏・蔚山金氏・高敞吳氏・晋州河氏・密陽朴氏・慶州朴氏이다. 함안지역의 토성으로는 李・趙・蔡・尹・劉・鄭氏가 확인된다. 이중 이씨와 조씨가 고려시대부터 上京從仕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일찍이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他邑 출신의 많은 명문 士族들이 함안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咸州鄕案』에 등재된 주요성씨도 이상 나열된 성씨들과 일치하고 있다.
함안의 유구성과 지역의 명문 사족을 열거한 다음에는 함안에서 향안이 작성된 유래와 1603년까지의 향안 重修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함안향안의 최초 작성 시기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玉石同匱薰蕕의 명분으로 향안을 만들었고, 이를 鄕射堂에 보관했다고만 나타나 있다. 조선전기 재지사족들은 기존의 吏族・庶孼 등을 배제한 향안의 작성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적 위치를 견고히 하려 했었고 그 과정에서 함안향안이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최초 작성된 향안은 回祿의 화를 입어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향안이 다시 중수되는데, 上庠이던 朴德孫이 序文을 쓰고 趙應卿이 좌목을 작성해서 東門 밖에 보관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런데 박덕손1501년에 司馬試에 합격한 인물이다. 박덕손조응경에 의한 향안 중수가 1501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최초 향안이 작성된 시기가 늦어도 16세기 초반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화재로 중수된 함안향안은 1572년에 새롭게 개편이 되는데, 이를 주도했던 인물은 당시 座首였던 趙庭彦과 別監 趙城이었다. 개편된 향안에서 가장 큰 특징은 呂氏鄕約을 모방했다는 점이다. 서문에는 1572년 개편 이후, 봄과 가을에 講信禮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는 朱子增損呂氏鄕約에 나오는 의식이다. 향안 조직의 행동강령과 의례에 대한 향약의 접목은 16세기 중반 이후 확산되는 양상이었다. 16세기 전반기부터 士林派에 의해 향약보급운동이 전개되었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李滉李珥, 그리고 그 문인들에 의해 향약 시행이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향안의 행동강령과 의례에 성리학적 규범체제가 가미된 향약이 접목되었던 것이다. 즉 이전까지 함안향안에서 확인 할 수 없었던 향약의 행동강령과 의례가 1572년 개편을 통해 확인되며, 이러한 양상은 16세기 사림파에 의한 향촌에서의 성리학적 지배질서 규범의 보급과 맥을 같이 한다.
개편된 향안은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한 번 더 소실되었고, 전란 중에 향안 복구 시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596년 전쟁의 소강기를 틈타 咸安郡守安沃의 주도 아래 李瀞朴齊仁, 서문을 작성한 李明怘의 부친 李偁 등에 의해 소실된 향안 복구가 시도되었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향안 복구의 노력은 草稿를 만들 단계에서 무산되고 만다. 전란으로 중단된 향안 복구 시도는 전쟁이 끝난 1599년에 재기되었다. 다행히 전란 중에도 李蘷가 향안의 초고를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었기에 향안 복구가 재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전란 중에 향안 복구를 주도했던 이정이 인근의 檜府, 즉 昌原大都護府使로 임명됨에 따라 이기가 이정을 찾아가 향안의 재복구를 의논하고 향안을 지금과 같이 복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 후반부에는 鄕員들에 바람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鄒魯의 나라이며, 함안은 鄒魯 중의 鄒魯라며 여기서 배출된 많은 인재들이 향안에 기재되어 왔으나 전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향안 복구를 시도하였으나 板蕩해진 나라의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2・3인의 鄕老들의 노력으로 향안 복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향안이 어렵게 복구되었으니, 향원들과 그 후세들은 향안을 잘 보존하고, 講信의 禮를 지켜 나갈 것을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중기 함안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 및 향안의 성격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적어도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당대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사족들이 주도하였었다. 함안향안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확인 할 수 있는데, 본 서문에서 확인되는 향안 중수 및 복구 주도 인물들은 당대 함안을 대표하던 명문사족으로 함안 지역 사족들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6세기 후반 함안향안 중수과정에서 확인되는 呂氏鄕約의 접목은 성리학적 규범을 향촌지배의 이념적 명분으로 삼으려는 사림파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직후 전란으로 소실된 鄕案의 복구는 함안을 포함해 여러 고을에서 시도되었었다. 향안은 단순히 좌목만을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니라, 향촌 운영의 주도세력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재지사족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향안 복구는 곧 전란으로 무너진 향촌 내 신분질서의 확립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 할 수 있다.
『南冥門徒 德川及門諸賢集』, 韓國學文獻硏究所, 亞細亞文化社, 1982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咸安誌』, 金漢重, 故鄕文化社,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一潮閣, 1995
『咸州鄕案』, 咸安文化社, 1996
『釜山史學』37, 張東杓, 釜山慶南史學會, 1999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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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603년 이명호(李明怘) 중수향안서(重修鄕案序)
重修鄕案序
吾郡古五伽倻之一也方丈一支東洪流蜿蜓焉
渾浩焉爲襟爲帶而淸淑之氣釀靈凝精自古將相
人多出焉郡之大姓望族曰趙土姓也曰李載寧
星州驪州仁川也其一亦士姓也曰安順興
廣州也曰魚咸從也曰金善山蔚山也曰吳高敞
也曰河晋州也曰朴密陽慶州也其他姓氏不暇
盡擧而皆大蕃衍名公鉅卿相繼輩出故地雖濱海
而家絃戶誦俗尙禮義風傳淳朴朝野咸以士大夫
鄕稱之則宜鄕射有堂而座目有案也第以邑中人
物其麗甚夥玉石不可以同櫃薰蕕不可以共器則
案之遴錄容可已耶有案藏諸鄕射中古爲回祿所
災而重錄之上庠朴公德孫序而書其顚自是繼記
簪纓之族束成一大卷衣以錦編以鐵而鄕大夫
公應卿亦譜擧鄕之族並藏而典守之堂在東門外
狹隘不能容隆慶壬申大而新之敦治其事者座首
趙公庭彦別監趙公城也每年春秋大設講席少長
咸集序以齒不以爵禮儀雍容衣冠整肅皆倣呂氏
鄕約而爲之不幸壬辰之變案與譜俱亡使二百年
祖先名位遺跡一朝失墜嗚呼痛哉丙申年間詔使
駐釜山兇賊穴海陲于時安侯沃鎭撫于郡西防禦
山之下有四五鄕老相與語曰亡失鄕案文獻無徵
吾輩數人若一朝就木則年少子弟何以知先世之
諱某爵某何以知先代之系出派分亦何以知吾州
人物之盛衣冠之美也重修之責政在於吾輩於是
使吾仲父掌其事而㳙日謀會朴師傅李淸州諸公
曁吾先君皆在焉相與追記古今座目列書其次而
兵燹之中死者多生者少寧不痛悼也哉時日搶攘
姑爲草秩以待事定丁酉秋賊再動李君夔幸齎懷
而全其稿此固神明扶持其有待於今日者乎戊戌
冬寇退己亥春遼鶴回翔禍慘松楸人子之情豈特
有泚於顙哉及其收而安厝也則諸公又相語曰情
事已伸案亦可修方謀成籍而不幸先君奄忽先逝
人皆謂鄕失蓍龜殊無樂意而在世之人聚散亦不
淸州公師傅公雖欲爲之誰尸爲之今
淸州公來莅檜府仲父謂李君蘷淸州公在近
君亦爲座首君其勉旃以旣厥事於是李君慨慨往
議于淸州公始克成其籍若非吾李君誰能任其責
而勇於成乎嗚呼吾南乃國家鄒魯之方而吾邑
即鄒魯中之鄒魯也奉展此案某人居是邦某也某之
先某也某之祖其禮義之隆文物之盛至今在人耳
目赫赫若前日事則十年賊窟無一人背義而附賊
者殆亦吾儕祖先遺風餘韻之所及也歟噫國朝
以來案之流傳凡幾歲矣一不幸而火於中古再不
幸而亡於壬辰中古全盛之時非無曉暢故事者而
重錄之際不無遺亡之患況今板蕩偏方人物百无
一二則所謂曉暢故事者豈易得哉幸我二三諸公
通貫古今而重述之自丙申至今凡八年之間將興
而旋廢幾成而復毁僅乃成之則玆案之修似不偶
然而不幸之中又有幸者焉噫物之廢興成毁相尋
於无窮則自今以往安保其永傳不朽也今人得一
金玉珎玩之物猶知愛護而襲藏況此案何如物也
子孫藏守不朽之心將無所不至矣昔蘇子瞻以先
人所嗜之盡托於浮屠閣以藏之意欲使之傳之无
窮此亦孝子慈孫之心也況今此案則非片盡比而
鄕射非佛閣比也典守之人亦非浮屠者之比也則
陵未遷谷未變之前亦安知其幸以傳而不朽也惟
願風憲諸公器而藏之寶而守之如遇水火盜賊則
背負以避勿使有前日遺亡之患且營一堂復修昔
時講議之規則豈非吾鄕之一大幸也其勉之哉案
之將成父老屬余作文以序之余以後生不知顚未
且以文拙辭之僉曰不可其敢不承萬曆癸卯十一
月日鄕生李明怘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