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직후,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질서 확립을 위해 1603년에 제정한 慶尙道密陽府 鄕規의 序文으로 朴壽春이 작성
菊潭集菊潭先生文集 卷之二 鄕規序菊潭集 卷二 三十二
卷1 詩․輓․賦, 卷2 疏․檄․序․文․箴․銘, 卷3 附錄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직후, 각 고을의 재지사족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했던 과제는 단연 전란으로 무너진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복구였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대읍이었던 密陽府에서도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 복구를 위해 전란으로 무너진 鄕射堂을 중창하고, 鄕案을 중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특히 향안복구는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대한 권위와 명분을 제공한다는 데서 많은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이에 밀양부에서는 1603년 우선 鄕案 조직의 제 규정인 鄕規를 새롭게 제정하였으며, 향규가 마련되자 밀양부의 재지사족 朴壽春이 그 序文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박수춘의 가문은 밀양의 土姓으로 先祖 때부터 밀양지역에 世居하며 대표적인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鄭逑의 문인으로 일찍이 家學을 통해 성리학적 소양을 닦았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었다. 박수춘은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재지적 기반과 임란 倡義의 경력을 바탕으로 密陽府 향안 복구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행 작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향규 마련에 참여하였으며, 그 서문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留鄕所는 옛날의 鄕大夫와 같다. 孝悌忠信은 사람의 근본으로 鄕黨에서 이를 행한다. 그러므로 유향소를 설치하여 德行을 지도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 糾明하여, 士民으로 하여금 집에서 修養케 하여 고을에 나타내고 나라에 퍼지게 한 것이다. 우리 고을이 비록 남쪽에 치우쳐 있으나 文獻의 고향으로 일컬어졌고, 큰 선비가 대를 이어 나타나 왕조의 師表가 되었으며, 보고 느끼며 薰陶되어 고을의 풍속이 맑고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遺風이 멀어지고 습속이 점점 나쁘게 변하더니 임진년의 兵火를 겪으면서 禮樂文物이 없어지고 파묻혔으니 어찌 비탄하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賦役은 많아지고 時事는 날로 변하여 유향소를 맡은 자는 官名과 供納에 분주하니 어느 겨를에 풍속을 가다듬어 옛날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태평한 시대로 바뀌는 운세는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秉彛의 天理는 천년이 똑같은 날이니 옛날과 오늘에 알맞은 것을 참작하여 옛 規範을 수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衆議를 모아 다음의 조목대로 열거하여 권장과 징계의 道具로 삼을 것이다. 우리 후진들은 서로 이 규약들을 勸勉하기 바란다.
이상 서문에서 확인되듯이 1603년 향규 제정의 가장 큰 동기는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향촌질서의 복구에 있었다. 특히 유향소 권위의 복구라는 측면이 주목된다. 16세기 중반 이후 재지사족들은 유향소 조직을 이용하여 鄕權을 행사해 오며, 官衙를 중심으로 한 首領과 吏族의 권력을 견제해 왔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후 유향소는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기관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박수춘의 서문에도 나타나듯이 유향소의 鄕任들은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데 분주하였으며, 특히 조세 수납을 대리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곧 유향소 권위의 저하로 이어지게 되었다.
재지사족들이 鄕權을 발휘하던 유향소의 권위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수령보조기관으로 실추되자, 곧 재지사족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수준으로 유향소의 권위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며, 이것이 곧 향규 제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사족들은 새로운 향규에 사족들의 관권에 대한 공동대응, 吏族의 참여 배제, 貪虐한 鄕吏의 처벌 사항, 재지사족 중심의 폐쇄적인 향안 입록 규정 등을 마련해 나가며, 유향소 권위 강화를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도모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직후 慶尙道密陽府 재지사족들의 동향이 나타나는 자료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근거지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밀양부의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따라서 전란 직후 밀양부 재지사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존의 향촌지배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의 마련이었다. 그 중 하나가 留鄕所를 통한 鄕權의 복구였다. 그간 재지사족들은 유향소 조직을 장악함으로써 지역에서의 향권을 행사해 나갔었다. 하지만 전란으로 고을의 鄕射堂과 鄕案 등이 소실되고, 倡義와 피난 등으로 재지사족들이 분산되자 유향소는 재지사족의 향권 수단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란 직후에는 관권을 견제하는 곳이 아닌, 관권의 업무를 보조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에 밀양부의 대표적인 재지사족 朴壽春 등은 기존의 유향소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복구하려했으며, 그 일환으로 1603년에 鄕規를 새롭게 마련하게 된 것이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菊潭集 全』, 朴壽春, 菊潭先生文集刊行委員會, 1987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역사와 현실』55, 장동표, 한국역사연구회, 2005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