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慶尙道密陽府龜齡洞에서 결성된 洞契의 서문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洞案을 복구하면서 金守訒이 작성한 서문
九峰先生文集 二九峰先生文集 卷之二 龜齡洞案序九峰先生文集 卷二 十九
一 : 序, 目錄, 卷1 詩․疏․書․雜著
二 : 卷2 雜著․序․記․跋․箴, 卷3 附錄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이 끝난 후, 密陽의 유학자 金守訒이 序文을 작성한 龜齡洞案은 조선전기 지금의 慶尙南道密陽市初同面 일대에서 결성된 龜齡洞契의 계원 명부이다. 龜齡洞은 지금의 初同面新湖里, 金浦里, 星萬里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구령동안의 대상인 구령동계가 결성된 것은 조선전기로 전해지고 있다. 밀양 출신의 문신 朴昭가 지금의 초동면 일대에 移居한 후 卞仲良, 卞季良 형제와 더불어 학문을 講學하고 향촌을 敎化하기 위해 결성했다고 한다. 구령동계의 명부인 구령동안에는 역대 동계 참여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작성된 것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전란 이전 선배들의 이름을 정리하여 追錄한 것과 대대로 25회에 이르는 新參 입록자의 이름이 확인된다. 김수인의 서문은 전란 직후 가장 먼저 동안이 작성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령동안의 서문에는 구령동의 유구성과 동안이 전란 이후 새롭게 작성되는 연유가 나타나 있다. 먼저 서문에서는 구령동에서 三國時代 때부터 高麗王朝에 이르기까지 많은 將相과 名家가 接武했으나 文獻이 부족하여 상세하게 그 名氏를 기록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조선조 이래로 당대 고관을 역임했던 卞季良, 일대의 문장을 주도했던 邊仲良을 비롯하여 朴昭, 朴彦忠, 孔嵩, 金孝給, 安覯 등이 배출되었다며, 窮僻한 洞에 ‘一命之士’도 많이 나오기 힘든데 구령동은 閥閱들이 相望하고 있는 고장임을 거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講信禮와 揖讓禮가 행해졌다고 한다. 즉 鄕約을 실시함으로써 향촌교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先代의 名錄이 소실되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鳥獸好音過耳’ 하던 옛 풍속을 복구하기 위하여 洞案을 새롭게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宋나라의 儒者 蘇氏가 말한 ‘稱人之善 必本其父兄師友 厚之至也’에 의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諱案을 櫃櫝에 넣어 두고 春秋講會 때 열람하여 후손들이 羹墻하는 수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이어 서문 마지막에는 감당할 기량이 되지 않으나, 선조 金晅이 구령동 출신의 변계량과 인척관계를 맺은 인연으로 서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기 밀양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엿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재지사족들은 전란으로 피폐화 된 향촌사회 복구에 주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종전에 유지되던 향촌 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러한 작업 중 대표적인 것이 洞契 결성 및 洞案 重修이다. 龜齡洞契의 洞案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전란이 끝난 후에는 이곳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동안 중수 작업이 시도된 것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密陽誌』, 密陽文化院, 1987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九峰先生文集 一』, 金守訒, 景仁文化社, 1995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