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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상(李震相) 석동의계안서(石洞義契案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C.0000.4784-20100731.Y104091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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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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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이진상, 석동의계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형태사항 크기: 31.2 X 21.8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49권 24책
판식: 半郭 : 16.8×21.8㎝, 四周單邊, 有界, 10行20字, 上下向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이진상(李震相) 석동의계안서(石洞義契案序)
19세기 후반 경상도창녕석동에서 실시된 석동의계(石洞義契)의 계원 명부인 계안(契案) 서문(序文)이다. 서문은 성주의 유학자 이진상(李震相)이 작성하였다. 의계는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석동의계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이러한 의계의 결성은 양반들의 지위 유지에 필수적 요건이 되는 하층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후기 한 마을을 단위로 많이 결성되었었다.
이광우

상세정보

19세기 후반 경상도창녕석동(石洞)에서 환난시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한 석동의계(石洞義契)의 명부 서문으로, 성주 지역의 유학자인 이진상이 작성
寒洲集 十七寒洲集 卷之三十三 序 石洞義契案序寒洲集 卷三十三 三十六
一 : 卷1 詩, 卷2 詩 二 : 卷3 詩, 卷4 疏․策 三 : 卷5 書, 卷6 書 四 : 卷7 書, 卷8 書 五 : 卷9 書, 卷10 書 六 : 卷11 書, 卷12 書 七 : 卷13 書, 卷14 書 八 : 卷15 書, 卷16 書 九 : 卷17 書, 卷18 書 十 : 卷19 書, 卷20 書 十一 : 卷21 書, 卷22 書 十二 : 卷23 書, 卷24 書 十三 : 卷25 書, 卷26 書 十四 : 卷27 書, 卷28 書 十五 : 卷29 書, 卷30 書 十六 : 卷31 書, 卷32 書 十七 : 卷33 序, 卷34 記 十八 : 卷35 跋․論, 卷36 辨․攷 十九 : 卷37 說, 卷38 後說 二十 : 卷39 雜著, 卷40 雜著 二十一 : 卷41 雜著, 卷42 雜著, 卷43 雜著 二十二 : 卷44 雜著, 卷45 雜著 二十三 : 卷46 銘․箴․贊․上樑文․祭文, 卷47 碑文․墓碣銘․墓表․墓誌 二十四 : 卷48 行狀, 卷49 行狀․傳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창산(昌山)석동(石洞)에서 결성된 석동의계(石洞義契)의 명부 서문으로 성주의 유학자 이진상이 작성하였다. 창산은 지금의 경상남도창녕이다. 의계(義契)는 환난 시 가난한 백성들의 생계를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계를 이른다. 석동의계안(石洞義契案) 서문에는 석동의계의 설립 과정과 의의가 나타나 있다.
서문의 대략적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영남은 평소 물자가 넉넉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산도 그 중 한 곳으로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이다. 그러나 근래 가뭄․홍수와 같은 큰 재난이 생겨 흉년이 들면, 젊은이들은 짐을 지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만이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으니 슬프고 처참한 상황이다. 이에 오우(吾友)들이 성회(聖會)를 조직하여 개연히 구제하자는 뜻에서 곡식을 각각 내어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 또 마을의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뜻을 같이 하자며, 각기 힘을 내어 이를 도우겠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안을 만들고 이름 짓기를 의계라 했다. 성회의 사람들은 모두 통재민식(通才敏識)하나 때를 만나지 못한 자들로 온축(蘊蓄)해 놓은 경륜을 이사(里社)에서 발휘하니, 고소(古蘇)의 의장(義庄)과 숭안(崇安)의 사창(社倉)을 가히 설치하고 운영할 만하다. 이에 봄과 가을 빌려 준 것을 거둘 때에, 이것을 환색(換色)하여 첨모(添耗)해서 나누어주는데 후하고 거두어들이는데 박하지 않는다면, 마을 사람들이 농사에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역역(力役)을 계산하여, 이를 자판(自辦)하고 선수(先輸)해서, 그 수에 따라 취식하고 전납(塡納)한다면 이에 민들이 종세(終歲)할 때까지 불견리(不見吏)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세상에 사대부가 해야 할 것으로 선공(先公)이 가난한 자들을 구휼한 의이다. 이렇게 한다면 예속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근심하고, 덕혜(德惠)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을 염려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 서문을 쓰니 힘써 이를 이루길 바란다.
이상의 서문에 따르면, 석동의계는 창산석동이라는 한 고을을 중심으로 환난 시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결성된 일종의 동계임을 알 수 있다. 또 봄과 가을 감산(歛散) 때 환색하여 첨모(添耗)하는 방법으로 구휼의 재용을 마련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동계의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이 사족들은 향촌을 중심으로 동계를 조직하여 재난이 생겼을 경우 가난한 하층민들을 구제하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향촌 내 사족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층민의 안정된 생활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사족들은 향촌 내 토지와 노동력으로 이들을 긴박시켜 나갔고, 그것을 동계 결성과 동약 제정으로 구체화해 나갔다. 창산에서 실시된 석동의계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결성된 동계이다.
『韓國文集叢刊: 寒洲集』, 李震相, 民族文化推進會, 2003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退溪學派와 理 철학의 전개』 , 琴章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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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이진상(李震相) 석동의계안서(石洞義契案序)
石洞義契案序
嶺南素穪衣食之鄕昌山居一路中野廣而土腴居
民安堵而樂業挽近旱澇成災歲値荐歉壯者荷擔
而四散老弱沿門而持鉢仳㒧啜泣景色凄慘吾友
成聖會慨然有拯濟意出穀幾斛貸窮乏不繼者曰
麥登場還我原數將另有措處爲永久圖且告里中
人曰以我而獨涉於市惠與我同志者其各出力補
之僉曰諾於是立案叙例名之爲義契夫以聖會之
通才敏識不遇於世無以展其蘊畜迺經綸於里社
之間其法則黃承事之所以上坐於張益州者而推
此以徃姑蘇之義庄可置也崇安之社倉可設也盖
其春秋歛散之際換色添耗賙乏者厚而取贏者薄
里無捐瘠而農以紓力且嘗計會一里力役之征自
辦而先輸之徐以其數取息而塡納於是民終歲不
見吏矣使今世爲士大夫者皆知先公貧之義如
聖會之爲者禮俗何憂不成德惠何患不廣哉余故
樂爲書之以勗其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