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엽 성주에 사는 李{糹+宙}와 그의 친족들이 모여 만든 족계의 서문
學稼齋集學稼齋先生文集卷三 序學稼齋先生文集卷三 十
내용 및 특징
이 계는 고려의 樂居副正公李德富가 오늘날의 성주군月恒面 일대로 이주하여 20여 代를 내려왔지만, 번성하지 못하여 종친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李{糹+宙} 자신의 아버지와 白川 李天封의 맏자제와 더불어 번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친족이 20여 명이 되었기에 족계를 창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족계는 족질 李元錫이 주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주는 서문에서 족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을 들어 경계하고 있다. 이 족계는 이주의 5대조의 묘소에 모든 친척들이 참여하여 각기 錢穀을 출자하여 성묘와 묘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친 후 福酒를 마시면서 족친들 간에 도리를 돈독히 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라면서 족계를 만들었다. 그는 족계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는 系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즉, 伊川 程頤가 말한 “인심을 단속하여 종족을 수합하고 풍속을 순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망각하지 않도록 함에는 반드시 그 계보를 밝혀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족계의 목적은 系譜를 밝히려는 것이며, 계보를 밝힌다는 것은 그 근본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족계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詩經』의 문구를 인용하여 “형과 아우는 서로가 좋아하고 서로가 교계하지 말라”하였는데, 이것은 어진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풍속의 아름다움을 시객이 경계한 바가 동기간에서 유발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習俗이 날로 淆薄하여지고, 族誼가 점차 소활하여지는 이때에 이 말을 거듭 경계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경』의 말을 경계로 삼고, 程頤의 말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후에야 위로는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고 아래로는 종친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근본을 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여러 종친들이 힘써 지키도록 하였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學稼齋先生文集』, 李{糹+宙},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