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윤자학(尹濨學) 신종계서(愼終契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C.0000.4686-20100731.Y104210500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윤자학, 신종계
작성지역 전라남도 함평군
형태사항 크기: 29.5 X 19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5권 2책
판식: 半郭 : 14.5x22.0㎝, 四周雙邊, 有界, 10行20字, 上三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2800
현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2800

안내정보

윤자학(尹濨學) 신종계서(愼終契文)
19세기 후반 지금의 전라남도함평군 일대에서 결성되었던 신종계(愼終契)의 서문이다. 서문은 함평 출신의 유학자 윤자학(尹濨學)이 작성하였다. 서문에는 계가 결성된 후, 계원들이 윤자학을 찾아가 계의 이름과 서문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정작 윤자학이 지어준 ‘신종(愼終)’이라는 이름이 계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아 서로 간에 이의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종(愼終)’이란 이름을 고집하는 윤자학의 입장에서 나열되어 있다. 신종계가 어떻게 실시되었고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서문을 통해 신종계가 조선후기 동리(洞里) 별로 널리 시행되었던 동계(洞契)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동계에는 동리의 양반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하층민들도 함께 참여하였으며, 경조사(慶弔事)가 발생했을 때 상호간의 부조(扶助)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이광우

상세정보

19세기 후반 全羅道咸平縣 일대에서 결성되었던 愼終契의 序文으로, 함평 출신의 유학자 尹濨學이 작성
東湖集 卷之上東湖遺稿 卷之二 序 愼終契序東湖遺稿 卷之二 四
卷之上 : 序文, 卷1 詩, 卷2 序․記․跋․雜著 卷之下 : 卷3 四禮祝笏, 卷4 民堡條約․補遺, 卷5 附錄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全羅道咸平縣 일대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결성된 愼終契의 序文이다. 서문은 함평의 유학자 尹濨學이 작성하였다. 서문에서는 契의 작명을 부탁 받고, 계의 명칭을 신종계라고 붙인 사연과 그 전말이 나타나 있다. 다른 契의 서문들이 契의 유구성, 의의, 계원들에 대한 바람과 다짐 등을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서문에는 먼저 이해 11월 상순에 再從姪 尹相顥, 族姪 尹相九, 族孫 尹炳善, 그리고 張文玉을 비롯한 大小 45인이 修契를 결정하고 契案의 명칭과 서문을 청했다며, 愼終契序를 작성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신종계의 흔적을 현재 찾을 수 없고 다른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신종계의 결성 시기에 대한 정확한 추정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서문 말미에서 당시 윤상구에게 건네는 말 중 40년 동안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어, 이를 윤자학의 나이로 미루어 보면 1869년에 작성된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 할 수 있다.
작명과 서문을 청하자 윤자학은 계를 결성한 경위를 두루 물어보고 생각한 끝에, 계의 결성은 오로지 孝에 그 뜻이 있는 것이라며, ‘愼終’으로 작명했다고 나타나 있다. 계원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끼리 敦睦하여, 형제끼리는 우애를 다질 것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명을 청했던 계원들은 ‘愼終’이라는 명칭이 난감했던 모양이다. 이에 윤상구와 윤병선은 계의 명칭을 ‘愼終’이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윤자학에게 여쭈게 된다. 그 까닭은 새로 결성된 契가 小民도 참여하는 契였기 때문이다. 즉 신종계는 향촌 내의 사족과 하층민이 모두 참여하는 上下合契였던 것이다. 상하합계는 조선후기 洞里 별로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어 효과적인 향촌지배를 위해 실시하였던 洞契에서 많이 나타난다.
윤자학윤상구윤병선이 계의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오히려 ‘愼終’이라는 명칭이 적절함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그는 親喪이 생기면 自盡해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아래 위의 구별이 없으며, 患難 때 相扶相助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며 小民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愼終’이라는 명칭을 못 쓸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윤상구와 그 무리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함이 이상하다며 핀잔을 주면서 서문을 마치고 있다.
이상 윤자학에게 계의 명칭과 서문을 부탁한 신종계가 실제 실시되었는지의 여부와 운영 양상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현재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서문을 통해 확인되는 작명 부탁 인물들의 면면, 小民이 함께 참여하고 患難시 상호간의 부조가 계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신종계가 함평의 坡平尹氏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종의 洞契였음을 추정 할 수 있게 해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각 洞里 별로 널리 시행되었었던 洞契의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는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이 향촌 내 지배질서 확립이라는 목적 하에 널리 결성이 되었다. 동계에는 재지사족들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지사족들은 동계 운영을 주도하며 향촌 하층민들까지 참여시켜, 동계 조직 안에 이들을 緊縛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 했다. 19세기 후반에 결성된 신종계 역시 그러한 목적 하에 결성되었던 동계로 추정 할 수 있다.
『東湖遺稿』, 尹滋學,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99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윤자학(尹濨學) 신종계서(愼終契文)
愼終契序
是歲至月上澣再從姪相顥族姪相九族孫炳善張斯文玉潤
甫與大小四十五人定議修契請弁案之
文與其名余詢其原委幷作而對曰古今修契多有
而是則各出於爲親非有他也余嘆吁不已曰孝哉
斯名孝哉斯人孰敢爲其名而名其案只可健羡不
顧昧拙嘉其意名其案而取宗聖言中愼終二字曰
愼終可名也何如云爾則其在諸員遜懼之道頓首
言曰此名雖嘉鄙等盡不肖也太過其稱號也曰惡
君等盡爲親之道盡爲子之職也何必敢辭耶且夫
斯名之爲美也非但各其孝於親而已其在宗族足
可爲敦睦之道其在朋友亦可爲信篤之誼也至哉
斯名之美相九炳善曰與小民同案無愧乎曰親喪
固所自盡而自天子達於庶人則似無傷於上下之
間而又是患難相扶之意也何愧之有余謂相九
余則實有愧也相九曰是何言也曰余則四十年來
一無爲親之事矣今聞豚兒伯仲俱入此案云心實
愧也少焉又請條約故旣難固免畧陳十五則於案
左以竢禮家之㪅考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