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全羅道咸平縣 일대에서 결성되었던 愼終契의 序文으로, 함평 출신의 유학자 尹濨學이 작성
東湖集 卷之上東湖遺稿 卷之二 序 愼終契序東湖遺稿 卷之二 四
卷之上 : 序文, 卷1 詩, 卷2 序․記․跋․雜著
卷之下 : 卷3 四禮祝笏, 卷4 民堡條約․補遺, 卷5 附錄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全羅道咸平縣 일대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결성된 愼終契의 序文이다. 서문은 함평의 유학자 尹濨學이 작성하였다. 서문에서는 契의 작명을 부탁 받고, 계의 명칭을 신종계라고 붙인 사연과 그 전말이 나타나 있다. 다른 契의 서문들이 契의 유구성, 의의, 계원들에 대한 바람과 다짐 등을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서문에는 먼저 이해 11월 상순에 再從姪 尹相顥, 族姪 尹相九, 族孫 尹炳善, 그리고 張文玉을 비롯한 大小 45인이 修契를 결정하고 契案의 명칭과 서문을 청했다며, 愼終契序를 작성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신종계의 흔적을 현재 찾을 수 없고 다른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신종계의 결성 시기에 대한 정확한 추정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서문 말미에서 당시 윤상구에게 건네는 말 중 40년 동안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어, 이를 윤자학의 나이로 미루어 보면 1869년에 작성된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 할 수 있다.
작명과 서문을 청하자 윤자학은 계를 결성한 경위를 두루 물어보고 생각한 끝에, 계의 결성은 오로지 孝에 그 뜻이 있는 것이라며, ‘愼終’으로 작명했다고 나타나 있다. 계원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끼리 敦睦하여, 형제끼리는 우애를 다질 것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명을 청했던 계원들은 ‘愼終’이라는 명칭이 난감했던 모양이다. 이에 윤상구와 윤병선은 계의 명칭을 ‘愼終’이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윤자학에게 여쭈게 된다. 그 까닭은 새로 결성된 契가 小民도 참여하는 契였기 때문이다. 즉 신종계는 향촌 내의 사족과 하층민이 모두 참여하는 上下合契였던 것이다. 상하합계는 조선후기 洞里 별로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어 효과적인 향촌지배를 위해 실시하였던 洞契에서 많이 나타난다.
윤자학은 윤상구와 윤병선이 계의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오히려 ‘愼終’이라는 명칭이 적절함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그는 親喪이 생기면 自盡해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아래 위의 구별이 없으며, 患難 때 相扶相助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며 小民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愼終’이라는 명칭을 못 쓸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윤상구와 그 무리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함이 이상하다며 핀잔을 주면서 서문을 마치고 있다.
이상 윤자학에게 계의 명칭과 서문을 부탁한 신종계가 실제 실시되었는지의 여부와 운영 양상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현재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서문을 통해 확인되는 작명 부탁 인물들의 면면, 小民이 함께 참여하고 患難시 상호간의 부조가 계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신종계가 함평의 坡平尹氏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종의 洞契였음을 추정 할 수 있게 해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각 洞里 별로 널리 시행되었었던 洞契의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는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이 향촌 내 지배질서 확립이라는 목적 하에 널리 결성이 되었다. 동계에는 재지사족들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지사족들은 동계 운영을 주도하며 향촌 하층민들까지 참여시켜, 동계 조직 안에 이들을 緊縛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 했다. 19세기 후반에 결성된 신종계 역시 그러한 목적 하에 결성되었던 동계로 추정 할 수 있다.
『東湖遺稿』, 尹滋學,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함평군사』, 함편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 1999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