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桂 金浩龜의 孝行을 敬慕하여 만든 벽계정유계안의 서문
後潭集 地序 碧桂亭儒契案序後潭文集卷之四 十
天 卷1, 卷2 詩
地 卷3 䟽 書, 卷4 雜著
人 卷5 記, 跋, 祝祭文, 墓誌銘, 墓碣銘, 傳 卷6 附錄
내용 및 특징
이 글은 碧桂 金浩龜의 효행을 敬慕하여 만든 것이다. 이 서문을 작성한 채헌식과 김호구는 각기 달성과 창녕에 살면서 서로 인접해 있었지만, 이 둘의 나이 차이가 20년이 넘으며 문집을 통해서도 이 둘의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서문은 채헌식이 남쪽 지방을 여행하던 중 들린 碧桂亭내의 韻板을 보고 자신의 의견을 적은 것이다. 그는 김호구의 가르침이 그의 손자에게 이어졌지만 그 핵심이 빠져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 契中의 유생들에게 설명한다고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호구는 寒暄堂 金宏弼의 후손으로서 그의 학문과 실행이 일대에서 높이 받들어 존중히 여겨졌다고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는 매우 깊어 天性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하였는데, 그의 부친이 臨終시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서 수일 동안 그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장례에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건너 있는 묘소에서 3년간 廬墓를 하였다. 어머니가 명을 다하자 눈비가 오더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省拜를 하였다. 어느 날 큰 호랑이가 길목에 나타났지만 그의 효성이 하늘에 닿아서 이에 감복하여 해치지 않고 물러났다고 했다. 또한 어머니가 임종시에도 그의 아버지에게 한 것과 같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장례시에는 절도에 맞게 행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우들을 애정으로 보살피고, 그 族戚들도 두루 살펴 구휼하였다. 子姪에게는 열성을 가지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農桑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학문에 힘쓸 때에 벼슬아치나 유생들이 덕이 있는 君子라고 칭송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오래지 않아서 碧桂亭을 지어 애석해 하였다. 그는 太學館의 掌儀를 지냈으며, 후에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대대로 회자될 만한 일이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땅에 가라앉은 듯 알려지지 않고 또한 서로 뒤섞여서 잘못 알려지고 있다고 있었었다. 그래서 향인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행적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퍼지게 하고, 그의 뜻을 닦고 정비하는 한편, 그를 敬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契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행적에 대하여 거듭 旌閭를 청하였지만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금하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 채헌식은 무릇 契라는 것은 合해지는 것이며 約이라는 것은 같은 마음으로 합치는 것으로서, 約은 김호구의 덕을 기준으로 하고 그의 가르침을 스승으로 하여야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꼭 그 말씀이 이 契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채헌식이 남쪽을 여행하던 어느날 이 정자에 올라서 耆碩을 찬양한 글들을 보았는데, 그의 손자 희달씨가 부지런히 많은 서적을 읽고 그의 학풍을 이었지만 그 핵심이 없다고 보았다. 즉 그의 학풍이 이어져서 쇠퇴하지는 않았지만 더 나은 점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韻을 이어서 자신의 글을 契中의 모든 君子들에게 설명을 하긴 하지만, 이 의견을 꼭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오세창 외,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後潭文集, 蔡憲植, 1962, 대구광역시
碧桂文集, 金浩龜, 昌寧 碧桂亭, 1931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