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박승동(朴昇東)의 금란계첩(金蘭契帖) 서문(序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C.0000.2771-20100731.Y104010170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박승동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형태사항 크기: 28.8 X 19.7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19권 8책
판식: 四周單邊, 半廓 20.3x16.1 cm, 有界, 10行20字,注雙行, 上下內向四瓣黑魚尾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19세기 말경 달성(達城)지역에서 만들어진 금란계(金蘭契)의 서문(序文)
이 금란계는 19세기 말에 知己들이 흩어져서 함께 모이는 것이 어려움을 한탄하며 모임의 자리를 만든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박승동이 서문을 지었다. 이들은 서로 맹세한 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하나의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이를 한 집안의 역사로 여겼다. 즉 이 계에 참여한 모든 집안의 후손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약속을 지키며, 박승동 등이 당년에 맺었던 일을 기억하고, 그들끼리도 서로 사귀게 하였다.
嶺南鄕約資料集成, 오세창 외,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渼江集, 朴昇東, 跋: 乙丑[1925]...尹按
이병훈

상세정보

19세기 말경 朴昇東達城지역 선비들과 맺은 金蘭契의 서문이다.
渼江集渼江集 卷之十 序 渼江集 卷十 三十六
卷1 詩, 卷2 詩·辭, 卷3~7 書, 卷8 雜著 卷9 雜著, 卷10 序, 卷11~12 記, 卷13 跋銘箴贊箋 卷14 上梁文 卷15 祭文 哀辭 卷16 神道碑銘 墓表 墓碣銘 墓誌銘 墓誌 卷17 行狀 行錄 卷18 傳 卷19 附錄 行狀 墓碣銘 跋
내용 및 특징
이 글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達城에 있는 선비들이 친목을 위해서 만든 金蘭契의 서문이다. ‘金蘭’이라는 말은 '쇠보다 단단하고 蘭처럼 향기로운 사이'라는 말로 '情이 두터운 친구 관계'를 비유하는 말이다. 원래 『周易』의 繫辭에 있는 말로서 '둘이서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蘭과 같다'고 한 말에서 나왔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고 정의가 두터운 사귐을 ‘金蘭之交’, 그런 친구를 ‘金蘭之友’라고 한다. 이 글에서는 金은 가장 단단한 것이지만 같은 마음으로서 그것을 자를 수 있으며, 蘭이란 것이 지극히 향기로운 것과 같이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의 말은 난과 같이 향기롭다고 하였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의 뜻은 견고하고 재물로도 능히 그 틈을 벌릴 수 없으며, 마음이 서로 달라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록 합하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契라는 것은 같은 뜻을 가진 자들이 모여 이루는 것이기에 그들은 계의 이름을 金蘭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 계는 박승동의 동갑 친우가 일찍이 知己들이 흩어져 함께 모이는 것이 어려움을 한탄하며 계를 만들어 모임의 자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서로 우정을 맹세하고 그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하나의 두루마리에 그 계의 목적과 참석자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이 계에 참여한 모든 집안의 후손들도 오랫동안 이 약속을 지켜서 자신들이 當年에 맺었던 일을 기억하고 그들끼리도 서로 정답게 지내길 바라고 있다. 이 금란계의 계안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 참여자의 명단을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존하는 타 지역의 금란계를 통하여 이들 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금란계라는 명칭은 조선전기부터 나타나며 이후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금란계는 조선초기이래 후기까지 詩遊를 목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며, 주로 한 고을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외세의 침입에 맞서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금란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박승동이 살았던 19세기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양반지배계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공통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동대응하기도 했다. 또한 본문에 鄕人善士, 傑士, 達士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가입한 자들이 士族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각지에 흩어진 자들이 친목을 이유로 뭉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만으로는 당시의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실제 박승동의 경우 금란계 외에도 그 목적과 시기에 차이는 있지만 19세기 말 무렵 白雲亭修契帖, 輔仁契案, 晉修契帖 등의 序文과 鄕約契案의 凡例를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많은 계가 만들어진 것은 그만큼 양반들의 권위가 떨어지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서로 단결할 필요성이 증대했기 때문이다. 이 금란계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친구들간의 계모임에서 더 나아가 향중의 인물들 중 자신들과 뜻이 맞는 이들도 이 계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자신들과 뜻을 같이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음을 입증한다. 결국 이 금란계가 언제 만들어 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19세기 말의 격변기에 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一鄕내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洞契의 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이 계의 운영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가 상호부조를 통해 운영되었기에 금란계 역시 그렇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일례로 경상남도의령부산리에서 시행된 금란계는 17세기 초에 결성되어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이 계의 절목에는 계원의 길흉시에 부조하는 물목의 종류와 수량 및 환난시 부조내용, 契錢을 殖利하는 것이 나온다. 달성의 금란계 역시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상호 부조에 대한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오세창 외,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渼江集, 朴昇東, 跋: 乙丑[1925]...尹按
이병훈

이미지

원문 텍스트

박승동(朴昇東)의 금란계첩(金蘭契帖) 서문(序文)
金蘭契帖序
古會友書無所謂契云者獨右軍將軍王逸少
稽內史謝安孫綽會集修契自爲之記(記文)又自爲之
書人稱千古勝會而名宰之淸常也後人之襲以契
者無數而歷歷可數者是誰乎吾同庚友牙雲子嘗
恨知已之散處難合剏一契而團會一席誠稀世之
勝事也亦不曰不鍾於蘭亭然顧無勲業之振耀者
又無字勢之雄逸者只是業儒而竆得年而老者也
亦何足踵之云乎哉雖然契何必達人傑士乃可爲
乎鄕之善士皆可友而其志同其意合則結社相從
之不足修契以益其同心者亦可爲交道之一助也
安可以古書之所無而忽之哉繫曰二人同心其
利斷金同心之言其臭如蘭以金之至堅也而同心
者斷之以蘭之至馨也而同心之言如之同心之義
固如此而物莫能閒者也此其同人之所有爲則豈
有古今之不同竆達之相殊乎所可殊者迹同而心
異相望旣遠則雖欲合之得乎是以名吾契曰金蘭
願諸君子胥體此意同此心合此契以所盟之約所錄
之目襍成一卷子以爲山中古實使諸家後承世世
相守知吾輩當年事有如此者以爲如何以是識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