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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준(文聲駿) 모성계서(慕聖契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WC.0000.2626-20100731.Y10429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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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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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문성준, 모성계
작성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형태사항 크기: 25.9 X 18.3
판본: 연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5권 2책
판식: 半郭 : 13.8×19.5㎝, 四周雙邊, 有界, 12行25字, 上向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문성준(文聲駿) 모성계서(慕聖契序)
20세기 초반 동래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결성한 모성계(慕聖契)의 서문이다. 서문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문성준(文聲駿)이 작성하였다. 모성계는 당시 밀려오는 외래 문물과 종교로 인해 쇠락해져가는 유학을 일으키고, 지역 유림들로부터 의연금을 모금하여 일제의 통제정책으로 위축된 동래향교에서의 각종 의례와 행사를 바로 실시하기 위하여 결성된 계이다. 외래 문물 및 종교의 유입과 일제의 통제로 위축된 유학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는 보수적 유림들의 활동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20세기 초반 쇠락해진 유풍을 회복하고 위축된 향교운영을 복구하기 위하여, 동래(東萊) 지역에서 결성된 모성계(慕聖契)의 서문으로 문성준(文聲駿)이 작성
耕巖私稿 坤耕巖私稿 卷之三 序 慕聖契序耕巖私稿 卷之三 四
乾 : 卷1 詩, 卷2 書 坤 : 卷3 雜著․序․記․跋․論․說․銘, 卷4 行狀․碑碣, 卷5 祭文․墓碣銘․跋
[내용 및 특징]
한말 또는 일제시대 때 동래(東萊)에서 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모성계(慕聖契)의 서문으로 동래의 유학자 문성준(文聲駿)이 작성하였다. 문성준이 작성한 「모성계서(慕聖契序)」에는 모성계가 결성된 목적과 운영 방향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문의 앞부분에는 밀려오는 서구 문물과 외래종교에 의하여 유풍(儒風)이 크게 쇠락해짐을 한탄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한(漢)나라구사(九師)가 나타나 주역(周易)의 가르침이 숨겨지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 백가(百家)가 나타나 성도(聖道)를 막히게 한 적이 있음에도, 지금은 오히려 백사(百師)와 천가(千家)도 모르는 지경이어서 쉽게 ‘귀양귀묵(歸楊歸墨)’하고, ‘난묘난주(亂苗亂朱)’하는 지경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20세기 전후하여 밀려들어오는 외래 종교와 문물을 구사와 백가에 비유하며, 세상의 풍습이 방종해지고 유풍이 더욱 경박해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행하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숭배(崇拜)가 막중함에도 의례에 행하는 종고생황(鐘鼓笙簧)의 소리가 끊긴지 오래이며 봄과 가을의 향사(享祀)와 초하루에 쓰이는 제물이 궁핍한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유림들이 당연히 행해야 할 문묘에서의 제례와 석전례(釋奠禮), 분향례(焚香禮)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향교의 위축된 상황은 한말, 일제시대 때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의 향교 통제정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성계는 이렇게 위축된 유풍을 회복하고 향교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 문성준동래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결성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향교는 동래향교이다.
서문의 뒷부분에는 모성계 운영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과 서문을 작성한 문성준이 다른 유림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모성계는 지역 유림들이 힘에 따라 출연(出捐)한 자금으로 운영되었다. 모여진 자금은 원금을 보존하고 이익금을 늘려 사용하며, 우선 제사와 향교 수리의 비용으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이어 공의(公議)로 계원들의 서차(序次)를 정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문성준은 “너는 군자로서 선비가 될지언정, 소인배의 선비는 되지 마라(汝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논어(論語)공자(孔子) 말을 인용하여, 계원들에게 선비로서의 올바른 행동을 당부하면서 서문을 마치고 있다.
이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 문성준의 문집에 별도의 행장(行狀)과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지 않아 모성계의 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일제에 의해 향교 운영이 크게 위축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으로 추측된다.
[자료적 가치]
일제의 향교통제 정책으로 크게 위축된 향교의 운영을 복구하기 위한 동래 지역 유림들의 대응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제는 일찍이 강점이전부터 유림들의 조직적인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향교에 대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일제시대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일제의 통제에 따라 각 향교는 재정적으로 크게 위축되며, 각종 제례와 행사가 끊기고 건물이 퇴락하는 처지가 되었다.
동래향교 역시 그러한 형세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동래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문성준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유림들이 참여하는 모성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한편 문성준은 본 서문에서 향교 운영의 침체를 외래문물 및 종교의 유입과 유풍의 쇠락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데, 당시 민족적 위기를 유학의 정통성의 회복에서 찾으려는 보수적 유학자들의 시대인식이 나타난다.
『耕巖私稿』, 文聖駿, 1937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退溪學釜山硏究院 傳統文化講座 發表資料』, 都民宰, 2007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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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문성준(文聲駿) 모성계서(慕聖契序)
慕聖契序
九師之敎興而道微百家之流出而聖道堙古之微道者九
師而今不知爲幾百師古之堙聖道者百家而今不知爲幾千家
奈之何人不歸楊歸墨而亂苗亂朱乎況今天下萬國各以其學
爲宗敎惟我海東一邦獨得吾道之的傳及自世潮漸盪儒風益
澆莫重文廟先聖先師崇奉之地久斷鍾鼓笙簧之聲將入荆棘
蓬蒿之路春秋之享幣牲乏需月朔之告餼羊壞禮嗚乎凡我冠
儒服儒之人孰無尊聖衛道之心也所以本鄕老少儒林同心齊
會恊議商確各隨力出義另修一契命名曰慕聖所聚元金存母
取子一以供享需之絀一以補修繕之費其餘追後磨練之意公
議峻發別爲序次如左云聲駿亦預於會諗于僉君子曰今日之
叅同皆儒林也夫子不云乎汝爲君子儒無爲小人儒願人皆請
事斯語則世之觀於吾契者仰慕之心油然自生矣是爲之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