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경주향교의 도유사孔應鐸이 경주향교의 퇴락을 안타까워하면서 향교의 중수를 결의하는 내용을 기록한 재임록
내용 및 특징
1862년 경주향교도유사가 된孔應鐸은孔子의 방계후손으로 향교가 쇠퇴해 가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이 때문에 퇴락한 향교를 중수하여 聖人이 계신 곳의 면모를 새롭게 일신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을 『考往錄』에 실었다. 이어 윤 8월에는 새로운 도유사韓發源이 부임하였으나 孔應鐸은 자신의 뜻을 거듭해서 밝히고 자신의 소유인 外東面 毛火伏員의 전답7두락지를 춘추향사에 쓰도록 공여하겠다는 뜻을 기록하였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반의 향교는 16세기의 향교와 달리 국가의 조직적인 경제지원이나 개인의 전답기증 등이 많지 않아서 지출은 늘어 나는데, 수입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본 문건도 이러한 당시 향교의 재정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