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에 도유사손세익 등이 대성전의 담벽을 수리한 일과 西廡의 담벽을 수리한 일 및 대성전 부근의 돌을 치우게 한 일 및 책을 찾은 일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齋任錄.
甲辰五月
내용 및 특징
1844년 5월에 경주향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은 도유사손세익 등이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대성전의 서쪽 모퉁이가 비바람의 침노를 받아서 비가 새는 곳이 있으므로 관청에 알리고 수리하였다. 西廡의 담벽에 기와가 덮이지 않은 곳이 있으므로, 育英齋에 두었던 기와 50장을 가져와 수리하였다. 대성전과 서무 사이 제기 있는 곳에 움푹 팬 돌이 있어 발을 다칠 우려가 있으므로 궤짝을 사서 제기를 넣어 殿守庫에 두었다. 『儀禮』27권을 金尺의 韓進士宅에서 찾았고, 『季漢書』20권을 周原의 崔監役宅에서 찾았다. 대성전과 교의상에 먼지가 있으므로 삭망의 香謁시에 미안하므로 꿩꼬리 빗자루를 구비하여 먼지를 털어내게 하였다. 연도로 볼 때, 손세익은 그 전 해에도 도유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전답의 방매에 대한 여론이라든가,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갑진년에는 비교적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인물이 도유사와 재임을 오랫동안 역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향촌에서의 영향력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에 등장하는 한용곤은 1835년이래 계속 재임을 맡고 있으며, 손세익 역시 도유사를 연임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향촌에 대한 영향력이 비교적 강한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경주향교의 재임은 특정 성씨가 번갈아가면서 역임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19세기의 향교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주향교는 경상북도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향교 중의 하나였지만, 안동지방처럼 재지사림의 영향력보다 향촌가문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 같다. 손세익과 한용곤 등 재임들의 명단을 통해 특정가문이 향교를 주도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의 향교는 교육적 기능은 많이 약화되었으나,제사적 기능은 여전히 강력하였다. 비록 향교의 권위가 과거보다 약화되긴 했지만, 향촌에 대한 지배력은 여전히 강력하였다. 향교의 실질적 운영을 맡고 있는 재임을 특정 성씨들이 좌우하고 있음은 임사록의 재임 명단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