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계묘년)에 도유사손세익 등이 대성전의 地衣를 바꾼 일과 享祀에 소요되는 물품들을 준비한 사실 및 효현왕후의 승하 등의 내용을 기록한 재임록(임사록).
癸卯二月日
내용 및 특징
계묘년에 경주향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은 도유사손세익 등이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우선 2월에는 대성전의 地衣가 낡고 오래되어 춘추의 향사의례에 쓰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우선 葛席 40립을 얻어 享祀時에 임시적으로 쓰도록 조처하였다. 또 제사용의 쌀을 담는 포대가 낡았으므로 면포 큰 마대 4건을 준비하였다. 향례에 사용되는 소반도 부족하였으므로 20좌를 새로 갖추어 놓았다. 청송댁이 만든 집과 첨성원의 6두락지를 4냥을 더 받기로 하고 인왕원의 땅 7두락지와 바꾼 것은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는 鄕論이 일어났다. 8월 25일에 효헌왕후가 승하하여 9월 1일부터 10일간 服喪을 입었다. 이 문서 역시 대성전의 여러 가지 미비한 물품, 바닥의 돗자리 교체 등,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다. 역시 향교에서 향사의식은 교육기능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기능이었임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기는 향교의 재정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이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사의식은 향교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중요한 제사의 물품 마련조차 관청의 상당한 보조 없이는 그 운영이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으로 향교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도유사의 권위도 많이 실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향교위답의 처리문제로 향론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재임들의 권위가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경주향교에서도 효헌왕후의 국상을 치뤘다는 기록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기록이라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