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에 경주향교에서 도유사 윤치겸(尹致謙) 등이 향교 위답을 팔고 또 새로운 밭을 산 일과 내남면의 굴산에서 민전을 받은 사실을 기록한 문서.
任司錄乙未五月 日
내용 및 특징
경주향교의 도유사 겸 경주부윤인 윤치겸이, 도지원(道只員)의 위답전(位畓錢)이 묵밭이 되었으므로 17냥에 방매하고 또 팔곡원(八曲員)의 3두락지 땅을 30냥에 방매하였으며, 이 중에 원동(院洞)의 이노(李奴)에게 수세(水稅)조로 4냥 5전을 주고 난 나머지 돈과 월성원(月城員)의 밭 3 두락지 등을 판 돈을 합쳐 45냥을 만들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경주향교에는 따로 수철점(水鐵店)이 없어서 내남면(內南面)의 굴산(屈山)에서 본래 봄 3월과 가을 10월에 10냥씩의 돈을 거두고 있는데, 향교에 민전(緡錢)이 귀하므로 봄 2월과 가을 8월에 민전(緡錢) 10속 씩을 납부하게 하라는 것 등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경주향교의 여타 문서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19세기초의 향교전답은 조선시대 초기와 달리 그 관리가 상당히 문란하였던 것 같다. 향교의 직임들이 마음대로 내파는가 하면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도 상당했던 것 같다. 논밭이 묵밭이 되어 이것을 관리하지 못해 헐값에라도 매각한다는 것은 그 전답의 관리가 매우 어려웠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경주향교 도유사를 경주부윤이 맡고 있는데 이는 경주가 동남의 큰 도시이기 때문인지, 적절한 도유사 감이 없었기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의 향교는 서원의 팽창으로 인해 조선시대초기에 가졌던 활력을 점차 상실하게 되고 제사기능만 온존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향촌을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향임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였으며 그들의 협조는 지방관의 향촌지배에 상당히 중요하였다.경주부윤이 직접 경주향교의 도유사를 맡았던 일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임사록』에는 두어 차례 보이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