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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壬辰年) 경주향교 임사록(任司錄)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XG.1832.4713-20090831.Y09101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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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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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이정순, 이노현, 손세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작성시기 1832
형태사항 크기: 34 X 40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 37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문중소개

안내정보

1832년(壬辰年) 경주향교 임사록(任司錄)
1832년 경주향교의 교임(校任)들이 경주향교의 운영현황을 기록한 일지 성격의 성책 고문서이다. 이 해에경주향교명륜당 뒤편에 나무를 심은 일을 비롯, 물품의 구입, 전 재임이 제멋대로 방매한 향교 소유의 전답을 되찾기 위해 돈을 마련한 일 등을 기록하였다.
남민수

상세정보

1832년경주향교에서 도유사 이정순 등이 명륜당 뒤편에 나무를 심은 일을 비롯하여 물품의 구입, 향교의 전답을 되찾는 돈을 마련한 일 등을 기록한 문서.
任司錄壬辰年正月
壬辰正月 日, 壬辰四月 日, 壬辰五月 日, 壬辰七月 日, 壬辰九月 日.
내용 및 특징
경주향교의 운영을 책임 맡고 있는 교임(校任)들이 경주향교의 운영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일지형식으로 기록하였다. 1832년 정월 아무개 날에는 명륜당(明倫堂) 뒤편의 송단(松壇)에 있는 나무를 베어 내어 엉성해졌으므로 비어 있는 자리에 나무 3 그루를 심었다. 또 대성전 협문의 지도리가 썩어서 이것을 수리한 사실 및 솥 1좌를 마련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투호(投壺)에 쓰이는 화살 15개를 일어버렸다가 이 일을 관청에 알리고 수색하여 되찾은 사실도 기록하였다. 이 해 4월, 동해면 수념평(東海面 水念坪)의 상자답(觴字畓) 11두락지와 상서평(上西坪)의 계자반답(稽字反畓) 4 두락지의 땅을 기묘년(1819년으로 추정)의 재임(齋任)이 멋대로 74냥의 돈을 받고 팔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방원(士方員) 소재의 향교답 32두락지를 도지(賭地)로 주어 58냥 5전의 돈을 마련하고, 와산원(臥山員)의 5두락지를 도지를 주고 받은 돈 21냥 5전 등, 도합 80냥의 돈을 마련하여 잃어버린 향교전답을 되돌리는 돈으로 충당하였다. // 이 해 5월에는 향교 서무(西廡)에서 풍우로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관청으로부터 돗자리 4개와 쇠못 18개를 얻어 수리하였다. 또 7월에는 대성전의 대나무제기 50좌, 술잔 싸는 보자기 4건 등이 필요함을 관청에 알려 구비하였다. 이 해 9월, 첨성대원(瞻星臺員)의 노비가 전답 6 두락지를 개간하고, 고리생원(庫李生員)에 청송댁이 집을 지었으므로 인왕원(仁旺員)의 밭과 서로 교환하여 4냥의 값어치가 늘어났으므로 다른 날에 이용하도록 기입해 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향교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양반들이 서원이나 서당을 올바른 교육기관으로 여김에 따라 향교는 양반들의 외면을 받았고, 그 결과 양반도 아닌 무자격자들이 대거 교생신분을 얻는 폐단이 생긴다. 심지어 향교의 직임을 맡은 자 들 중에도 무자격자가 많아 제멋대로 향교의 재산을 편취하는 자들이 생겨난다. 본 문건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의 향교는 서원의 팽창과 더불어 점차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여러 가지 폐단을 노출하게 된다. 이 임진년의 문건을 보더라도 향교의 재임이 제멋대로 향교의 전답을 방매해버리는 폐단이 나중에 적발되어 이를 바로 잡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향교의 재정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문건중의 하나이다. //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원문 텍스트

1832년(壬辰年) 경주향교 임사록(任司錄)
壬辰正月 日
倫堂後松壇有翦伐疎闊處植之以
三株墻外植之以十株以待後人之培
達焉
大成殿西夾門樞年久蠹朽故報官
修葺
釜壹座片片破落故稱以古鐵給価
文壹兩捌戔改備焉
投壺乃揖讓之一節而三十矢未知那辰
見失而只有十五箇且年前入官尙今未
推故告 官搜出置之殿內
戊寅年齋任所費校位東海畓方營
還退未就而遞故付之新任
都有司 幼學李鼎淳
掌議 李魯賢
典穀有司 韓用坤
壬辰四月 日
東海面水念坪觴字畓十一斗落只及上西
稽字反畓四斗落之地己卯年齋任捧価七
十四兩放賣故自鄕中定送知事一員改量
定▣▣退而本価則賣士方員所在本校
畓三十二斗落只一年賭地捧價五十八兩
五錢又賣六通員所在校畓十七斗落
臥山員五斗落只一年賭地捧価二
十一兩五錢合文捌拾兩以柒拾肆兩右
畓還退価給餘六兩往來路費及尺
量時雜用下又不足二兩自校中出給
都有司 幼學 李鼎淳
掌議 孫明國
尺量鄕員 孫世顯
典穀 鄭相宅
壬辰五月 日
西廡壁爲風雨所敗故報官摘奸僅得葦
席四立鐵釘十八介爲先修補焉
壬辰七月 日
大成殿竹籩五十坐及祭酒尊袱四件報
官改備焉
壬辰九月 日
瞻星臺員奴子私耕田六斗落庫李生
靑松宅建屋而以仁旺員七斗落只田
相換而添価四兩則移用於日下記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