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에 경주향교에서 도유사 이정순 등이 명륜당 뒤편에 나무를 심은 일을 비롯하여 물품의 구입, 향교의 전답을 되찾는 돈을 마련한 일 등을 기록한 문서.
任司錄壬辰年正月
壬辰正月 日, 壬辰四月 日, 壬辰五月 日, 壬辰七月 日, 壬辰九月 日.
내용 및 특징
경주향교의 운영을 책임 맡고 있는 교임(校任)들이 경주향교의 운영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일지형식으로 기록하였다. 1832년 정월 아무개 날에는 명륜당(明倫堂) 뒤편의 송단(松壇)에 있는 나무를 베어 내어 엉성해졌으므로 비어 있는 자리에 나무 3 그루를 심었다. 또 대성전 협문의 지도리가 썩어서 이것을 수리한 사실 및 솥 1좌를 마련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투호(投壺)에 쓰이는 화살 15개를 일어버렸다가 이 일을 관청에 알리고 수색하여 되찾은 사실도 기록하였다. 이 해 4월, 동해면 수념평(東海面 水念坪)의 상자답(觴字畓) 11두락지와 상서평(上西坪)의 계자반답(稽字反畓) 4 두락지의 땅을 기묘년(1819년으로 추정)의 재임(齋任)이 멋대로 74냥의 돈을 받고 팔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방원(士方員) 소재의 향교답 32두락지를 도지(賭地)로 주어 58냥 5전의 돈을 마련하고, 와산원(臥山員)의 5두락지를 도지를 주고 받은 돈 21냥 5전 등, 도합 80냥의 돈을 마련하여 잃어버린 향교전답을 되돌리는 돈으로 충당하였다. //
이 해 5월에는 향교 서무(西廡)에서 풍우로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관청으로부터 돗자리 4개와 쇠못 18개를 얻어 수리하였다. 또 7월에는 대성전의 대나무제기 50좌, 술잔 싸는 보자기 4건 등이 필요함을 관청에 알려 구비하였다. 이 해 9월, 첨성대원(瞻星臺員)의 노비가 전답 6 두락지를 개간하고, 고리생원(庫李生員)에 청송댁이 집을 지었으므로 인왕원(仁旺員)의 밭과 서로 교환하여 4냥의 값어치가 늘어났으므로 다른 날에 이용하도록 기입해 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향교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양반들이 서원이나 서당을 올바른 교육기관으로 여김에 따라 향교는 양반들의 외면을 받았고, 그 결과 양반도 아닌 무자격자들이 대거 교생신분을 얻는 폐단이 생긴다. 심지어 향교의 직임을 맡은 자 들 중에도 무자격자가 많아 제멋대로 향교의 재산을 편취하는 자들이 생겨난다. 본 문건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의 향교는 서원의 팽창과 더불어 점차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여러 가지 폐단을 노출하게 된다. 이 임진년의 문건을 보더라도 향교의 재임이 제멋대로 향교의 전답을 방매해버리는 폐단이 나중에 적발되어 이를 바로 잡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향교의 재정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문건중의 하나이다. //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