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 윤6월의 洞會時에 만들어진 洞員들의 명단
내용 및 특징
이 문서은 河回의 『洞員錄』으로 정조 2년(1778) 윤6월에 있었던 洞會때 기록되었으며, 마멸되어 현재에는 이름을 알 수없는 3인을 제외하고, 총 89명의 명단이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洞案의 경우 서문과 계원들이 지켜야 할 洞規, 그리고 계원들의 명단인 座目의 순으로 되어있지만, 여기에서는 좌목만이 기재되어 있다. 표지는 庚午 7월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1810년 내지 1870년으로 짐작된다. 동원들의 명단은 나이순으로 적혀 있으며, 성명 밑에 태어난 연도와 字를 적고 있다. 89명의 명단은 크게 상인과 중인으로 나눠진다. 中人은 柳 8명, 金 1명에, 추가로 들어온 南 1명이다. 이들의 기록은 완전하지 않아서 성씨만 기록하던가, 아니면 생년과 자호를 적지 않았다. 중인 柳聖郁은 40세였음에도 字를 적지 않은 것은 洞案내에서 이들과의 구분을 확실히 짓기 위하여 별도로 中人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자를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2명은 성명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이 문서는 干支만이 나와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등재된 인원 중 柳載春이 1753년 사마시에 합격한 기록이 있어서 연대를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동회가 시행될 때 柳載春는 53세며,柳聖學은 61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문서 내에 있는 ‘仰贊’은 父子가 함께 좌목에 등재할 경우에 아들의 명단위에 표시하여 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앙찬 밑에 기술된 명단 중 생년만 있고 字가 없는 것은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6세로 나이가 제일 낮은 柳台祚로부터 22세였던 柳近祚까지는 字가 없으며, 21세지만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이는 柳應祚와 柳方春은 字를 갖고 있다. 류씨들의 집성촌이 풍산면하회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洞案이기 때문인지, 좌목내에는 류씨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보면, 仰贊 위의 명단 중 57명이 류씨이며, 李氏와 安氏가 각 2명씩이다. 앙찬 내에서도 류씨가 17명이며, 안씨는 1명뿐이다. 중인들 또한 류씨가 8명이며, 金氏와 南氏가 각 1명씩 있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編, 安東民俗博物館, 2006
1차 :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