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년 봉정사에서 우향계의 수리를 위한 집회일정 안내와 집회의 결과임.
내용 및 특징
우향계은 가장 먼저 수계된 계회로서 조선 태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李原(1368∼1430)의 아들 李增(고성이씨)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1478년에 학덕있는 안동의 선비 12명(안동권씨 3명·흥해배씨 4명·영양남씨 4명·안강노씨 1명)과 함께 우향계를 조직하고 회원 13명이 ‘계첩’을 하나씩 나누어 가진 것에서 시작된다. 이 우향계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족의 후예들이 안동출신 사족들과 연대하여 결속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자 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여러 명칭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우향계안에 이름을 올렸는데, 1478년부터 1903년까지 계회에 참여한 인물들은 약 570인에 이른다. 좌목에는 주로 계원들의 직역과 성명, 본관, 字, 생년, 거주지 등의 항목을 적고 부친이나 우향계의 창립선조들과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취회 일시와 장소, 참여인원 등이 기록되어 있어 우향계의 계승과 확장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13인이 우향계를 조직한 뒤, 이증의 아들 李浤이 그의 아우, 매부 및 다른 회원의 손자, 사위 등 15명과 함께 ‘眞率會’를 조직하였으며, 이굉의 서자 李側이 아버지의 碑陰記에 진솔회를 결성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이러한 우향계와 진솔회를 ‘契軸’으로 만들어 회원이 나누어 가졌는데 그 원본의 하나가 충재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우향계축(보물 제896-1호)이다. 이 진솔회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진솔회원인 이굉의 신도비에 의하면 이굉은 73세 때인 1513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낙동강에 歸來亭을 짓고 향중의 선비들과 진솔회를 결성하였으며, 3년 후인 병자년에 타계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에 따른다면 진솔회 결성은 1513~1516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처음 우향계를 만들었을 때는 5개 성씨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중 흥해 배씨와 안강 노씨가 보이지 않고 淸州鄭氏, 안동김씨, 潘南朴氏, 綾城具氏 등의 인물이 새롭게 보인다. 15명의 인물들 중 우향계의 후손들은 이증의 아들인 이굉·이명, 권곤의 아들 권사영·권사빈, 권자겸의 아들 권철경·권철종, 권개의 아들 권숙균, 남치영의 아들 남팔준·남경지 등이다. 이중 권숙균은 권사영·권사빈의 사촌동생이 된다. 충재종택에 소장된 우향계축에서 權萬은 이들 정, 김, 박, 구씨가 우향계축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 진솔회는 우향계원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솔회에 이어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동월 28일에는 우향계의 후손들 중 안동권씨 10명, 고성이씨 1명, 흥해배씨 1명이 연명하여 11월 10일에 계회를 개최함을 알리는 회문이다. 이들은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우향계를 수리하기로 이미 의결했지만, 그동안 지체되었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으니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래서 계를 수리할 계획을 논의할 것이니 모든 이들이 참석하여서 이 모임이 똑바로 나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였다. 그 결과 11월 10일에 60여 명에 이르는 계원들이 우향계와 진솔회의 계승을 표방하며 천등산봉정사에 모여 세호계로 계의 명칭을 변경하고 총 9개조의 규약을 의결하여 정하였으며, 계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62명을 관아에 呈單하였다.
자료적 가치
‘友鄕稧帖’은 당초 ‘우향계축’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승한 ‘진솔회'와 ’세호계‘ 및 ’수호계‘까지 400여 년간 당초 회원 13명의 내외후손들이 그때 그때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확대 재결성하고 모임 때마다 회원들의 송시첩을 잘 정리해 놓은 책자로서 1478년에 작성된 우향계가 어떻게 계승· 발전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조선시대 계회의 변천사례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충재종택, 『友鄕契軸』(보물 제896-1호) / 안동민속박물관,『友鄕稧案』, 시도유형문화재 제327호.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編, 安東民俗博物館, 2006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