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禮安郡 陶山面의 退溪宗宅이 화재로 소실되자, 경주군수李琦가 의연금 모금을 위해 발송한 첩유와 취지서
帖諭
내용 및 특징
慶州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중에 ‘各公文編纂綴’이라는 제목으로 소장되어 오던 大韓帝國 시기의 공문서 중의 하나이다.隆熙2년(1908)은 乙巳條約 이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大韓帝國의 완전한 합병을 위해 통감부체제를 유지하면서 나라의 명맥을 완전히 끊고자 광분하던 시기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당시 儒林과 地方鄕校의 동향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이는 儒林과 地方鄕校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본 문건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문건은 慶州郡守李琦가 1908년 4월 15일에 경주향교掌議李泰榮에게 발송한 첩유이며, 두 번째 문건은 첩유에 첨부되어 있는 募金趣旨書이다. 먼저 첩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퇴계의 宗宅에 심한 화재가 일어나서 宗宅을 重建해야 할 필요가 생겼으므로 경주관내의 有志人士에게 의연금모금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첨부되어 있는 취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東方朱子로 추앙되는 退溪先生의 고택에서 화재가 일어나 重建의 필요성이 생겼으므로 政府의 각 大臣들이 三百圜 이라는 의연금을 출연하였다. 고택의 중건문제는 尊聖衛道의 德業을 성취하는 큰일이므로 각 鄕校와 儒生들은 약간의 義捐金이라도 모금하여 古宅重建에 一助하라는 내용이다.
자료적 가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韓日合邦이후에 成均館의 명칭을 經學院으로 바꾸고 이를總督이 관장하는 직속기구로 둘 정도로, 일제는 儒林의 동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위 첩유와 취지서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명목상으로는 東方의 朱子인 退溪先生의 宗宅건립을 위해서라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쓰고 있으나 의연금의 실제모금 및 그 처리에 과한 일체의 사무를 일본인 서기관 塩谷一太郞이 맡는다는 구절을 보면, 그들의 의연금모금의 진정한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통감부 시기의 향교에 대한 일제의 여러가지 정책은 아직까지 그리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본 문건은 이 시기 鄕校의 어려운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1차 집필자: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