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62년 경상도 유림의 상서(上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XB.1862.4713-20090831.Y091010600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이능선, 이종연, 이동화, 예조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작성시기 1862
형태사항 크기: 117 X 68
수량: 1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문중소개

안내정보

1862년 경상도 유림의 상서(上書)
1862년慶州의 幼學 李能宣을 비롯한 경상도 유림들이 禮曹에 올린 上書로, 蔚山의 故 處士 崔宗立의 孝行에 대한 襃獎을 청하는 내용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1862년慶州의 幼學 李能宣을 비롯한 경상도 유림들이 禮曹에 올린 上書로, 蔚山의 故 處士 崔宗立의 孝行에 대한 襃獎을 청하는 내용이다.
내용 및 특징
1862년경주의 유학 李能宣, 칠곡의 유학 李鍾淵, 울산의 유학 李東和경상도 유림들이 예조에 올린 상서로, 경주에서 울산으로 移居 한 故 處士 崔宗立의 襃獎을 청하는 내용이다. 상서에는 위의 3명 이외에도 경주지역에서 進士 李寅久를 비롯한 34명, 칠곡지역에서 幼學 李在淵을 비롯한 7명, 대구지역에서 유학 李玄福을 비롯한 5명, 예안지역에서 幼學 李晩性을 비롯한 4명, 榮川지역에서 進士宋泰仁, 선산지역에서 進士許烒을 비롯한 2명, 현풍지역에서 進士金魯東, 순흥지역에서 유학 權壁泳을 비롯한 4명, 永川지역에서 幼學 鄭鎭憲을 비롯한 8명, 울산지역에서 進士李岐淵을 비롯한 3명이 함께 참여하였으며, 예조에서 내린 19일자 題辭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예조에 올린 상서에는 최종립의 효행과 그를 襃獎해야 할 당위성을 언급하고 있다. 상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서의 첫 부분에는 뛰어난 행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 죽어 원통함을 가지고 있으니, 울산의 故 處士 崔宗立이 바로 그런 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종립조선 개국 초 成均館司成을 역임하였던 崔汭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鄕里에 뛰어난 효성으로 소문이 나 孝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인은 소홀한 음식을 먹으나 부모에게는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병이 나셨을 때에는 嘗糞甘苦하며, 건강을 살폈으며 하늘에 건강을 빌었다. 애통하게 부모님께서 생을 떠났을 때에는 勺水不入하며 장례를 엄중히 치렀고, 그 후에는 묘 옆에 비석을 세우고 侍墓살이를 하였다. 侍墓살이 중에는 채소와 과일,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비바람을 막지 않고 밤낮으로 哭을 함이 살고자 하지 않는 자와 같았다고 한다. 3년 동안 드러내었던 그의 효성은 日記 1책에 기록하였으니,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外除를 마친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생일을 맞이해서는 부모가 劬勞한 날이라며 泣을 하였다. 그러나 최종립의 효성은 그가 죽음으로써 결국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렇게 드러나지 못함이 이제 80년이 지나니, 一道의 公論을 모아 상서를 올려 襃獎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조로부터 5~6차에 걸쳐 題辭를 받았음에도 顯晦한 그의 행적을 드러내 준다는 답은 얻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이렇게 경상도 지역 유림의 공론을 모아 상서를 올려 襃獎을 청한 것이다. 이 상서에 대하여 19일자로 예조에서 題辭가 내려졌다. 題辭는 卓異한 행적이 극히 嘉尙하나 襃獎하는 것은 事體가 중요한 일이니 의논을 하겠다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이후 최종립의 襃獎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재지사족들의 활동 사항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상서가 올라 간 1862년은 전국적으로 民亂이 일어나며 향촌 내, 양반의 지위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양반층은 향촌 내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여러 구실을 찾았으며, 그 중 하나가 드러나지 못한 선조의 襃獎이었다. 본 문서에서 襃獎의 대상이 된 최종립 가문은 일찍이 선조가 조선 건국 초 顯職에 올랐으나 최종립이 살았던 18세기 후반 무렵에는 가세가 많이 기운 듯하다. 이에 최종립을 포장하는 상서가 올라가게 되었고, 여기에는 경주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 유림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들이 상서를 함께 한 것은 향촌 내 위협받고 있는 양반의 지위를 확고히 하자는 이해가 맞물려서이다. 한편, 본 자료가 경주향교에 소장 된 것으로 보아 이 상서에 참여했던 유림들이 경주향교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古文書와 兩班文化』, 鄭求福, 一潮閣, 2002
이광우

원문 텍스트

1862년 경상도 유림의 상서(上書)
慶尙道慶州幼學李能宣柒谷幼學李鍾淵蔚山幼學李東和等謹齋沐再拜上書于
禮府尙書閤下伏以褒寵孝行列聖朝扶植倫綱之昭典也甄援遺逸大宗伯承宣諮度之戱節也然而挽近以來此等闡揚玉石相蒙薰蕕雜故其間不無卓異之
行高世之倫而進言者嫌於汨薰而過自泯嘿聽言者眩於眞贋而遂生厭薄是以草澤巖穴之間懷抱道德砥礪名行深藏不市者非無其人而卒老死空谷凐沒無稱豈不寃
矣乎生等道蔚山有故處士崔宗立眞其人也國初成均司成淸白吏諱之後素以慶州士族移寓此邑自齠齔時以孝誠聞于鄕里人皆敬脈謂之孝童及其有室以家貧
無以奉養遂稟翰墨之業脈曰力穡以給菽水懋遷有無以供甘毳夜則讀書以悅親志晝則擊鮮以繼親旨寒則以身溫被暑則以扇凉枕不避艱險未嘗憚勞常置
酒向招致鄕曲問父兄親舊日以歡娛爲事而艱窘之色未嘗使親見之人以爲邵南之家有北海之風其親有疾嘗糞甛苦驗其差劇齋沐祈天請以身代及遭大故哀毁
過節絶而復甦殮殯之前勺水不入口慎終諸節一從家禮踰月而葬傾財豎碣手植松楸廬于墓側不食菜果而飮水喫鹽所居堊幕不蔽風雨而晨昏拜哭如不欲生
墓前當膝處莎穽草楛夜大及幕有虎闞于側驚起避火人以爲孝感所致柴毁骨立聲摧血泣三年如一日嘗有日記一冊盖誌其爲親備忘之意也外除後始還
家遑遑焉如有失朔望雞風雪必掃塋域忌日哀霣無異袒括每逢生日輒垂泣曰父母劬勞之日也不聽家人設小酌臨終遺誡附葬先人足下其他懿蹟美行煩不
盡記而此其大畧也孝哉若人觀其踐履雖若平易而實非血身所可堪處苟非天相其間豈能保命終身也哉有此卓異之行而九門修復無由上徹尙未蒙褒寵之
典一道之公論積鬱已至八十年之久而其間禮曺蒙題亦至五六次矣時之顯晦人之通塞有待而然歟太史公曰巖穴勵行之士非附靑雲之手惡能名於後世哉
今日靑雲之手閤下不得辭也伏乞閤下採察別錄以實行懿蹟特爲
啓聞俾伸幽明之感至祝至懇之至
[着官][署押] 壬午三月日幼學李能白慶州進士李寅久幼學李能睦孫永昌孫秀卓孫秀華李錫祺崔元復崔濟健崔濟顯南敎海南敎河南朝鐵李鍾基
李耆榮李圭寀李翼榮李圭玄李圭彬鄭獜和鄭基鎬崔世立崔錫範崔泌壽郭永坤郭南鎬郭民鎬徐埰
權五運徐尙麟徐尙杓徐相祖黃晩錫黃南錫李徽榮朴時華李根秀朱永奎朱秉浩鄭鐵載李震久
孫永文李夏永李準夏柒谷幼學李在淵李光淵進士李肇榮幼學李建煥李鍾淵李以漢李廷煥大邱幼學李玄福李根饗李泳魯崔南敎崔廷岳禮安幼學李晩性
李中栢李中八權重瓚安東進士金景洛幼學李象駿李敎赫洪起大李在璣柳東弼仁同進士張祐遠星州進士鄭晦容榮川進士宋泰仁幼學宋寅銖宋寅均
宋鎭天進士金奎炳尙州進士金奎錫善山進士許烒幼學許烍玄風進士金魯東順興幼學權壁泳權翼泳權秉昱進士權斗泳永川幼學鄭鎭憲鄭鎭愚鄭來源成宗濬成怡鎭曺秉琥曺秉鐸
柳埰蔚山進士李岐淵幼學李容鎬李容簡
卓異之行極[印]爲
嘉尙然褒體重勳[印]該只議
向事
十九日[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