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慶州의 幼學 李能宣을 비롯한 경상도 유림들이 禮曹에 올린 上書로, 蔚山의 故 處士 崔宗立의 孝行에 대한 襃獎을 청하는 내용이다.
내용 및 특징
1862년경주의 유학 李能宣, 칠곡의 유학 李鍾淵, 울산의 유학 李東和 등 경상도 유림들이 예조에 올린 상서로, 경주에서 울산으로 移居 한 故 處士 崔宗立의 襃獎을 청하는 내용이다. 상서에는 위의 3명 이외에도 경주지역에서 進士 李寅久를 비롯한 34명, 칠곡지역에서 幼學 李在淵을 비롯한 7명, 대구지역에서 유학 李玄福을 비롯한 5명, 예안지역에서 幼學 李晩性을 비롯한 4명, 榮川지역에서 進士宋泰仁, 선산지역에서 進士許烒을 비롯한 2명, 현풍지역에서 進士金魯東, 순흥지역에서 유학 權壁泳을 비롯한 4명, 永川지역에서 幼學 鄭鎭憲을 비롯한 8명, 울산지역에서 進士李岐淵을 비롯한 3명이 함께 참여하였으며, 예조에서 내린 19일자 題辭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예조에 올린 상서에는 최종립의 효행과 그를 襃獎해야 할 당위성을 언급하고 있다. 상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서의 첫 부분에는 뛰어난 행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 죽어 원통함을 가지고 있으니, 울산의 故 處士 崔宗立이 바로 그런 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종립은 조선 개국 초 成均館의 司成을 역임하였던 崔汭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鄕里에 뛰어난 효성으로 소문이 나 孝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인은 소홀한 음식을 먹으나 부모에게는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병이 나셨을 때에는 嘗糞甘苦하며, 건강을 살폈으며 하늘에 건강을 빌었다. 애통하게 부모님께서 생을 떠났을 때에는 勺水不入하며 장례를 엄중히 치렀고, 그 후에는 묘 옆에 비석을 세우고 侍墓살이를 하였다. 侍墓살이 중에는 채소와 과일,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비바람을 막지 않고 밤낮으로 哭을 함이 살고자 하지 않는 자와 같았다고 한다. 3년 동안 드러내었던 그의 효성은 日記 1책에 기록하였으니,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外除를 마친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생일을 맞이해서는 부모가 劬勞한 날이라며 泣을 하였다. 그러나 최종립의 효성은 그가 죽음으로써 결국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렇게 드러나지 못함이 이제 80년이 지나니, 一道의 公論을 모아 상서를 올려 襃獎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조로부터 5~6차에 걸쳐 題辭를 받았음에도 顯晦한 그의 행적을 드러내 준다는 답은 얻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이렇게 경상도 지역 유림의 공론을 모아 상서를 올려 襃獎을 청한 것이다. 이 상서에 대하여 19일자로 예조에서 題辭가 내려졌다. 題辭는 卓異한 행적이 극히 嘉尙하나 襃獎하는 것은 事體가 중요한 일이니 의논을 하겠다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이후 최종립의 襃獎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재지사족들의 활동 사항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상서가 올라 간 1862년은 전국적으로 民亂이 일어나며 향촌 내, 양반의 지위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양반층은 향촌 내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여러 구실을 찾았으며, 그 중 하나가 드러나지 못한 선조의 襃獎이었다. 본 문서에서 襃獎의 대상이 된 최종립 가문은 일찍이 선조가 조선 건국 초 顯職에 올랐으나 최종립이 살았던 18세기 후반 무렵에는 가세가 많이 기운 듯하다. 이에 최종립을 포장하는 상서가 올라가게 되었고, 여기에는 경주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 유림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들이 상서를 함께 한 것은 향촌 내 위협받고 있는 양반의 지위를 확고히 하자는 이해가 맞물려서이다. 한편, 본 자료가 경주향교에 소장 된 것으로 보아 이 상서에 참여했던 유림들이 경주향교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古文書와 兩班文化』, 鄭求福, 一潮閣, 2002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