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에 지은 星山李氏 泉味書堂稧의 序文
東庵集 乾東庵集卷二 序東庵集卷二 七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1902년 李熙魯가 지은 서문으로 星山李氏의 자제들을 교육하던 泉味書堂의 운영과 관련하여 만든 稧에 대한 설명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학교가 있었지만 후세로 내려오면서 지방의 학당이 폐지되어 사족 집안에서는 책은 있지만, 더 이상 전각에서 책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고 하였다. 이희로의 집안도 儒學家로서 대대로 忠信을 主로 하여, 詩書를 생활화하였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 후손들 역시 講學을 하지 않는 習俗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자하게 놀기만을 일삼아 家學이 끊어지게 될 처지에 놓였다. 이에 전적으로 후손들을 교육해서 이러한 집안의 학업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며, 어진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再從弟 李鎭基와 그의 동생 3인이 재산을 출자하여 一室을 짓고 경영하며, 자녀와 조카들을 모아서 가르치면서 이름하기를 '書堂稧'라 하였다. 그리고 이희로에게 와서 서당계의 뜻을 구하기에 말하기를 善行의 시작은 쉬우나, 그 善行을 마무리 하는 것은 어려우니 家學이 침체된 것을 떨치고 점차 회복하는 것은 이미 사람들을 가려서 수레에 실은 것과 같으니 善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희로 자신이 불민하여 선행을 마침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장차 모두 함께 그것을 이루자고 하였다. 즉, 성산이씨 집안에서 쇠퇴한 家學을 다시 세우고 운영함을 집안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자는 것으로 서당계를 만든 것이다. 실제로 20세기초 대한제국의 교육상황은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이후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이 갑오개혁으로 육조를 개편한 팔무아문 중 學務衙門이 창설되어 신교육을 시행하기 위한 체제를 갖추게 된다. 여기에서 근대학교 교육의 시행을 위한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사범학교, 대학교, 기예학교 등의 직제를 설치함으로써 종래 성균관이나 향교의 교육적 역할을 배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과 향교는 인재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신학교에 빼앗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래 구교육 기관으로서의 지위와 역할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향교의 현실은 향교유림의 향촌사회에서의 비중도 약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에 향교의 자구책은 구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위유지를 위한 자구책으로 鄕塾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郡面里를 단위로 향교유림이 향숙(서당)을 만들었고, 후일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주체내지 역량이 되었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東庵集』, 李熙魯, 刊地, 刊所, 刊年未詳
1차 :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