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일제시대 경상북도칠곡에 世居하고 있던 晉州蘇氏 일족에서 결성한 永慕齋契 명부 序文으로, 달성 출신의 유학자 蔡憲植이 작성
後潭集後潭文集 卷之四 序 永慕齋契案序後潭文集 卷之四 二十六
天 : 卷1 詩, 卷2 詩 / 地 : 卷3 書, 卷4 雜著,序 / 人 : 卷5 記,跋,上樑文,墓誌銘,墓碣銘,狀傳, 卷6 附錄
내용 및 특징
구한말, 일제시대 때 활동한 달성군의 유학자 蔡憲植이 작성한 永慕齋契案의 序文이다. 永慕齋契는 인근 칠곡에 世居하던 晉州蘇氏들이 그들의 顯祖 蘇論東을 기리며 일족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族契이다. 채헌식이 작성한 서문에는 진주소씨들이 追遠하는 현조 소논동의 업적과 족계가 결성된 연유 및 동기가 나타나 있다. 대략적인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논동은 일찍이 執徐島夷之訌, 즉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었다. 그는 英邁한 자질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지략으로 鄕兵들을 인솔하여 많은 적들을 斬獲하여 宣武勳에 올랐고 折衝將軍守門將이 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소논동은 山林에 은거해 있다가, 1640년 경상도관찰사李命雄을 도와 칠곡의 架山城 축조에 지략으로 도우며 汗馬의 공을 남겼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논동의 공을 가상히 여겨, 論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가 동남쪽 保障의 일을 논했다는 까닭이다. 그의 초명은 應烈이었다. 소논동의 묘는 그의 雲仍들이 세거하게 되는 칠곡枝川永淸洞에 마련되었다. 그 후 某年에 소논동의 후손들이 墓道에 비석을 세우고, 齋室을 설립한 뒤 春秋享祀를 지내게 되었다. 이 재실의 이름이 바로 永慕齋이다. 그리고 선조를 羹墻하기 위해 契를 결성하니, 재실의 이름을 따 永慕齋契라 하였다. 선조의 尸祝을 통해, 그가 보여주었던 忠義를 후손들에게 드러내고자 결성된 것이다. 서문의 마지막에는 소논동의 10세손 鎭澤, 鎭五가 契案의 서문을 간곡히 부탁하여 부득이하게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 서문을 볼 때, 영모재계는 19세기 이후 향촌의 재지사족들이 일족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조직되었던 전형적인 족계의 과정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더 이상 契는 이전 향약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기능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顯祖였던 소논동의 顯揚을 통해, 칠곡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진주소씨 일족의 결속력을 다지고, 향촌에서의 위상을 높여 그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永慕齋契를 결성한 것이다.
자료적 가치
구한말, 일제시대에 결성되었던 족계의 결성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永慕齋契案의 서문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이 契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계의 결성 목적이 현조인 소논동을 제사지내고 그 충의를 顯揚하고자 했다는 데서 볼 때, 향촌 내 진주소씨 일족들의 결속력과 지배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의 족계임을 알 수 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향촌사회사연구회, 민음사, 1990
『古文書硏究』16, 韓國古文書學會, 1999, 정구복, 韓國古文書學會, 1999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