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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상(李震相) 돈재의계안서(遯齋義契案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WC.0000.4784-20090831.Y094091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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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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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이진상, 돈재의계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형태사항 크기: 31 X 22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49권 24책
판식: 半郭 : 22×17, 四周單邊, 有界, 10行20字, 內向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이진상(李震相) 돈재의계안서(遯齋義契案序)
19세기 후반 성주의 유학자인 이진상(李震相)이 오래 동안 세거해 오던 북비가(北扉家)를 중심으로, 일족이 가담하는 돈재의계(遯齋義契)를 결성하였다. 계원의 명부인 계안(契案)의 서문은 이진상이 직접 작성하였으며, 계의 이름은 현조(顯祖)인 돈재공(遯齋公) 이석문(李碩文)의 호에서 딴 것이다. 돈재의계는 일족 간의 결속력 강화와 조상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일종의 족계(族契)이다.
남민수

상세정보

19세기 후반 성주의 유학자 李震相이 오랫동안 세거해 오던 北扉家를 중심으로 일족의 결속력 강화와 선조를 기리기 위해, 아들 李承熙와 더불어 결성한 遯齋義契의 契案 序文으로 李震相이 직접 작성
寒洲集 十七寒洲集 卷之三十三 序 遯齋義界案序寒洲集 卷三十三 二十八
一 : 卷1 詩, 卷2 詩 / 二 : 卷3 詩, 卷4 疏,策 / 三 : 卷5 書, 卷6 書 / 四 : 卷7 書, 卷8 書 / 五 : 卷9 書, 卷10 書 / 六 : 卷11 書, 卷12 書 / 七 : 卷13 書, 卷14 書 / 八 : 卷15 書, 卷16 書 / 九 : 卷17 書, 卷18 書 / 十 : 卷19 書, 卷20 書 / 十一 : 卷21 書, 卷22 書 / 十二 : 卷23 書, 卷24 書 / 十三 : 卷25 書, 卷26 書 / 十四 : 卷27 書, 卷28 書 / 十五 : 卷29 書, 卷30 書 / 十六 : 卷31 書, 卷32 書 / 十七 : 卷33 序, 卷34 記 / 十八 : 卷35 跋,論, 卷36 辨,攷 / 十九 : 卷37 說, 卷38 後說 / 二十 : 卷39 雜著, 卷40 雜著 / 二十一 : 卷41 雜著, 卷42 雜著, 卷43 雜著 / 二十二 : 卷44 雜著, 卷45 雜著 / 二十三 : 卷46 銘,箴,贊,上樑文,祭文, 卷47 碑文,墓碣銘,墓表,墓誌 / 二十四 : 卷48 行狀, 卷49 行狀,傳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성주의 유학자 李震相이 아들 李承熙와 함께 결성한 族契 契案의 서문이다.
서문에서는 먼저 高祖 遯齋公 李碩文, 伯曾祖 四美公 李敏謙, 從祖祖父 農棲公 李奎鎭, 涵淸府君 李亨鎭의 先德을 기리면서 일족의 유구성을 밝히고 있다. 이석문은思悼世子의 호위무관으로 있으면서 1762년, 英祖가 세자를 죽이려 할 때, 그를 구원하다가 巫蠱를 당하고 쫓겨나 고향에 北扉家를 짓고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민겸은 學德과 行誼가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이규진이형진黃甲의 으뜸이 되고, 靑衿을 진작시키며 北扉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이어 오랫동안 세거해 오던 北扉가 불행히 후손되어 겨우 초석만 남은 상태가 되었는데 凝窩가 晩年에 벼슬에서 돌아와 小齋를 舊址에 重構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凝窩는 그 軒에 ‘遯齋遺業’이라 牓하고, 그 室에는 ‘讀書種字’라고 扁하였으며, 記文을 작성해 선조의 아름다움을 기렸다. 이어서 凝窩는 小帖에 손수 先德의 淵源을 적어 나에게 주어 墨帳으로 전해지게 했는데 근래에 典刑이 寢邈해지고 習俗이 달라져서 ‘讀書種字’의 뜻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고 염려하고 있다. 이에 이진상은 遯齋書室에서 아들 承熙와 의논하여 遯齋義契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族契의 결성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어 이진상은 아들에게 조상을 욕되이 하지 말고 契를 잘 운영해 나갈 것을 강조하면서, 花樹之月에 모여 契를 만들고 義庄을 운영해 나가며, 일족끼리 敦睦하고 讀書를 꾸준히 해 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流俗에 빠지거나 姑息에 안주하지 말고 先烈의 뜻을 기릴 것을 당부하면서 서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결성되었던 族契의 일면목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향약과는 별도로 一族 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族契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족계의 경우 18세기 이후, 一鄕을 아우르던 향약의 명색이 무색해지고, 향촌을 중심으로 결성 된 동계 역시, 양반층의 분화와 하층민의 저항으로 권위가 약해지는 가운데, 족적 기반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많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족계는 사족으로서의 자기규제, 상부상조, 선조 제사에 대한 봉행, 현조 顯揚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세기 후반, 성주의 오랜 종가인 北扉家를 중심으로 결성된 遯齋義契 역시, 공통된 조상을 바탕으로 일족 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의 族契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星州郡誌』, 郡誌編纂委員會, 星州郡, 1996
『古文書硏究』16 , 「韓國 族契의 淵源과 性格」, 정구복, 韓國古文書學會, 1999
『韓國文集叢刊: 寒洲集』, 李震相, 民族文化推進會, 2003
『退溪學派와 理 철학의 전개』, 琴章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이진상(李震相) 돈재의계안서(遯齋義契案序)
遯齋義契案序
我高祖考遯齋公卓犖有奇節不肯隨世俯仰餌之
以閫節而削迹於權奸之門威之以椄槢而排閤於
巫蠱之變永謝朝籍歸臥鄕廬此堂舊南扉撤而北
之不欲與時輩接世以北扉家稱焉伯曾祖四美公
隱居行義以文學成就後進一時摻觚之士咸被爐
之韛功從祖祖父農棲公曁我王考涵淸府君益振
拓之魁黃甲而振靑襟北扉之名始發於筵說我
先君兄弟妙少時尙及戲墨於斯畢竟成立之卓有
足以矜式鄕黨黼黻皇猷不幸歲久屋圮只存所礎
之痕凝窩翁晩年賦歸重搆小齋於舊址牓其軒曰
遯齋遺業扁其室曰讀書種子作記文闡先徽繼以
小帖手書先德淵源積累啓佑之實以貽小子俾爲
墨帳之傳小子才資淺薄袛可守約以自憙不能有
倡率誘掖之功而典刑寢邈習尙益渝讀書種子幾
乎絕矣屬此衰暮益切憂歎日子承熙以遯齋書室
藏修奬進之故議于同堂結爲義契將有以抒息以
取資焉余曰是在汝輩膩近而不汚瀦深而不洩周
于義而不比則吾祖之業庶不至於荒墜由是而推
之則花樹之月會可設也姑蘇之義庄可置也行之
以愼守之以確入之以和出之以儉則何患乎不成
哉然有其具而無其實則適足爲忝先之資盍於鳩
財之外另念敦睦之誼讀書之際知有義理之學謹
言行愼威儀篤倫理尙名節勿以流俗自處勿以姑
息爲安則紹先烈綏後錄之美不待求之於外物而
便可得之於吾心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