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성주의 유학자 李震相이 작성한 것으로, 조선중기 同鄕 유학자였던 金宇顒의 학문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 받아 講學하기 위해 조직한 考槃洞契의 契案 序文
寒洲集 十七寒洲集 卷之三十三 序 考槃洞契案序寒洲集 卷三十三 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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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 : 卷35 跋,論, 卷36 辨,攷 / 十九 : 卷37 說, 卷38 後說 / 二十 : 卷39 雜著, 卷40 雜著 / 二十一 : 卷41 雜著, 卷42 雜著, 卷43 雜著 / 二十二 : 卷44 雜著, 卷45 雜著 / 二十三 : 卷46 銘,箴,贊,上樑文,祭文, 卷47 碑文,墓碣銘,墓表,墓誌 / 二十四 : 卷48 行狀, 卷49 行狀,傳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만들어진 考槃洞契案의 序文으로 성주 출신의 학자였던 李震相이 작성하였다. 考槃洞契는 1877년 李震相이 중심이 되어 성주의 여러 선비들과 조직한 學契로 同鄕 출신의 학자였던 金宇顒의 학문을 기리고, 이를 이어 받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考槃洞契案은 考槃洞契 계원들의 명부로, 이진상이 작성한 서문에는 고반동계라 命名한 연원과 결성 목적이 언급되어 있다.
서문의 대략적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옛날 朱子가 雲谷에 오두막을 짓고 武夷山을 노닐었던 것과 退溪가 濯纓 한 뒤 退陶에 은거하며 淸凉山을 노닐었던 것은 대개 어질고 지혜로운 자의 즐거움이요, 유학의 道가 나아가는 바이다. 우리 文貞公 金先生 역시, 주자의 陽秋와 퇴계의 正脈을 이어 받아 은거할 만한 곳을 골라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고을에 은거할 집을 지으니 考槃精舍라 명하였다. 藏書한 책이 1,000여 포가 넘으니 光名室과 같았다. 이때가 萬曆戊寅(1584) 연간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바야흐로 어려운 일을 당해 북쪽으로 오랑캐가 일어나고, 남쪽으로 왜적이 침입해 와 임금이 灣上까지 피난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난이 진정되고 承命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니, 圖書는 모두 불타고, 精舍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은퇴하여 歸隱 할 곳이 없어 배회하다 鼎坐山에서 寓居를 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반정사가 있었던 곳은 菟葵燕麥이 오랫동안 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憲宗乙巳(1845)에 冑孫 沙棲公이 塵篋에 있던 舊牒을 살펴보고, 이곳 바위 언덕 아래에 遺躅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鄕人들과 더불어 자금을 마련하여 터가 있었던 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나도 어릴 적 外氏를 따라 이곳에 갔다가 깊이 景慕하는 마음으로 詩를 짓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선비들의 자취를 쫒아 修契를 하고 新規를 만드는 것으로, 一鄕의 선비들과 뜻을 모았다. 각기 出力하여 이곳에 다시 書堂을 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을 것이다. 이리하여 案을 만들어 書名을 한다. 생각하건대 賢人을 기리는 것은 정자를 짓고 풍류를 노래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星學六圖』로 啓沃의 模로 삼고, 『經筵講義』로 獻替의 規로 삼아 우리 선생께서 남긴 遺敎를 헛되이 하지 않겠다. 鄕人들이 塾成한다면, 그 어느 날 樵牧들도 모두 교화되어 絃誦하는 날이 올 것이니, 武夷와 淸凉 만이 百代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 서문에 따르면, 고반동계는 고반정사를 짓고 향촌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강학을 하려 했던, 김우옹의 뜻을 이어 받아 조직된 學契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성주의 여러 선비들과 자금을 모아 옛 고반정사의 터에 서당을 짓고, 『星學六圖』와 『經筵講義』를 주요 교재로 삼아 후학에게 강학하여 향촌을 교화해 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學契 결성을 통한 성주 지방 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李震相을 비롯한 성주의 사족들은 동향 출신의 학자였던, 金宇顒이 강학의 터전으로 삼으려고 세웠던 考槃精舍 설립의 뜻을 이어 받아 學契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자금을 모아 이곳에 서당을 짓고 교재를 정하여 강학할 것임을 서문에 밝히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결성은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19세기 후반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사족들 간의 결속력 강화를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 자료를 통해 19세기 후반 성주지역 퇴계학파 동향의 일면목을 살펴 볼 수도 있다. 또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19세기 후반 외국문물의 유입에 따른 유학의 쇠퇴에 대한 유림들의 대응 방향도 엿 볼 수가 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星州郡誌』, 郡誌編纂委員會, 星州郡, 1996
『韓國文集叢刊: 寒洲集』, 李震相, 民族文化推進會, 2003
『退溪學派와 理 철학의 전개』, 琴章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