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성주지방 학문진흥을 위해 결성한 星山學契 契案의 序文으로 李源祚가 작성함
凝窩集 七凝窩先生文集 卷之十三 序 星山學契案序凝窩先生文集 卷之十三 二十一
一 : 卷1 詩, 卷2 詩 / 二 : 卷3 詩, 卷4 賦,箴,銘 / 三 : 卷5 疏, 卷6 啓,議 / 四 : 卷7 書, 卷8 書 / 五 : 卷9 書, 卷10 書,通文 / 六 : 卷11 雜著, 卷12 雜著 / 七 : 卷13 序, 卷14 記 / 八 : 卷15 記,後敍, 卷16 跋,說,辨,祝文 / 九 : 卷17 祭文,哀誄文, 卷18 碑,墓碣銘 / 十 : 卷19 墓碣銘,墓誌銘, 卷20 行狀 / 十一 : 卷21 行狀, 卷22 行狀,行錄,遺事,傳
내용 및 특징
19세기 중반 성주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李源祚가 작성한 星山學契 契案의 序文으로, 성산학계의 결성목적과 과정이 나타나 있다.
서문에 나타난 학계 결성의 목적과 과정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원조는 관직생활을 마친 뒤 고향인 성주로 낙향하여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癸丑年(1853), 성주의 대표적인 서원인 檜淵書院에서 設講이 있었는데, 모인 자가 수 백인이었고 4일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당시 設講의 비용은 育英社孰 兩所에서 나온 것이었다. 設講을 마친 후, 여러 인사들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設講이 열렸으나 우리 고장은 재용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여 지속적으로 設講을 이어 갈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設講을 계속 잇기 위한 방법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약간의 돈을 내어 100여緡을 모아 春秋 供饋의 비용으로 삼게 되었다. 他鄕의 儒士들이 또한 많이 聞風하여 함께 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각기 案에 書名을 하고 이름 붙이기를 學契라 하였다. 그리고 절목을 별도로 만들어 영구히 遵行하는 道로 삼게 되었다며, 학계의 결성과정을 밝히고 있다. 이어 이원조는 서문을 통해 학계의 결성이 好學하는 人心의 고유함과, 吾鄕의 대표적인 서원인 회연서원에 배향된 兩先正(鄭逑와 李潤雨)이 講明하던 뜻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며, 재차 학계 결성의 의의를 기리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고을 단위의 學契 결성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9세기 一鄕을 단위로 한 학계의 결성은 고을 내 학문진작을 위한 목적도 있으나, 사족들 간의 결속력 강화에도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은 중,하층민의 성장과 양반층의 분화 등으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되어가던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강학을 목적으로 한다 해도 一鄕을 아우를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은 쉽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星山學契는 성주 출신의 학자로 중앙의 고위직에 오르며, 고을 내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李源祚가 관여했던 만큼, 많은 이들이 참가한 학계가 결성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凝窩全書』, 李源祚, 驪江出版社, 1986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星州郡誌』, 郡誌編纂委員會, 星州郡, 1996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 경상북도대학교 퇴계연구소, 역락, 2006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