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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향약조목후발(鄕約條目後跋)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WC.0000.4713-20090831.Y09406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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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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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이정익, 이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형태사항 크기: 31 X 21
판본: 목판본
장정: 선장
수량: 6권 3책
판식: 四周雙邊 半郭 19.7×15.9 ,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향약조목후발(鄕約條目後跋)
19세기 초 경주부윤이 시행한 향약의 발문으로서 상하민 사이의 구분과 역할을 강조하는 글이다.
남민수

상세정보

19세기 초 慶州府尹이 시행한 鄕約의 跋文
甘華集 地甘華文集卷四 跋甘華文集卷四 十三
내용 및 특징
경주부윤李潞가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李鼎益(1753~1826)이 생존시에 부임한 경주부윤이덕현으로서 그가 경주에서 향약을 시행하였다고 하지만, 본 문건에서는 이 향약을 준비하여 실시한 사람이 完山 李候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덕현은 본관이 용인이라서 제외가 된다. 또한 이정익이 살았던 시기에 본관을 완산으로 하는 관리는 李潞 뿐이다. 그는 1821년 12월에 부임하여 1823년 4월까지 재임하였다. 그래서 이 향약은 부임한 이듬해인 1822년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경주는 적서간의 분쟁이 점차 심해지고, 富民들의 신분이동 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즉 서얼들은 신분차별을 요구하며 18세기 중엽이후 꾸준히 신분상승을 시도하면서 鄕案 등에 이름을 올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 양반기득권층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또한 18세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대읍을 중심으로 많은 부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경주지역에 있었던 饒戶富民이라 불리는 일부 농민층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이 鄕約은 이러한 시대상황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세월이 쇠퇴하여 사람들이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상실하여 윗사람을 대우하지 않고, 부유한 아래 사람들이 넘지 말아야 할 것을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윗사람이 진실로 백성들을 따르게 하고 세상과 관청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향약을 실시해야한다고 보았다. 향약은 윗사람의 뜻을 적어서 법으로 정하여 엄하게 시행하여 왔는데, 근래에는 이 또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다행히 경주부윤이 이러한 사항을 개탄하여 향약을 수리하여, 기강을 세우는 방법으로 향약을 시행하고 16명의 대표를 정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묻도록 하였다. 이에 16명 개개인은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 後任에게 책임을 넘기기 전까지 그 향약을 잘 지켜서 지방을 순화하여 고치도록 하니, 경주일대가 장차 변화하여 과거의 鄒魯之鄕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자료적 가치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甘華文集』, 李鼎益, 刊地, 刊所, 刊年未詳
이병훈

이미지

원문 텍스트

경주(慶州) 향약조목후발(鄕約條目後跋)
鄕約條目後跋
約之爲言其衰世之意乎記曰大信不約不約而信
者信在言前此非不言而喩者乎孝悌忠信禮義廉
耻等事自是吾人性分中固有民生日用間常行而
上之人無待乎家諭而 戶曉下之人不越乎目擩而
耳染油然自發於秉彛好德之良心則復焉用區區
於約束之末屑屑於文爲之間哉叔季以降習俗漸
偸誓字一出而衆心旋惑盟言始作而羣疑益滋先
儒有言曰殷人作誓而民乃始畔周人屢盟而亂是
用長所以葵丘之會背之者有之而矍相之圃去之
者半矣初不如無誓無盟之爲愈則今夫約之言亦
誓盟中一事也說者因是而爲之語曰有約不如無
約噫是猶曰曷不爲太古之無事者也何以知古君
子隨時變易之道哉易之復卦必繼於山地之剝者
將有復生之理也詩之下泉特係於變風之末者盖
以思治之意也時有升降俗不得以不變世有汚隆
法不可以無弊當此之時在上之人苟欲率衆而勵
俗憂世而矯弊舍是約奚以哉惟我靜庵退溪
先生俱以堯舜我君民之心每於鄕約上有意次叙
條件嚴立章程不啻屢數百言而至今百載之下無
一人擧而行之者可勝歎哉幸我完山李侯知州之
初慨然有志於修古之政博詢廣採於某某鄕士而
諭之曰儒賢輩出之地風韻如掃衣冠文物之鄕禮
俗無徵豈不爲東都鄒魯鄕之一大欠缺者乎爰謀
所以立綱陳紀之道議定鄕約揭示準的以十六員
長之以責其任十六員副之以董其事吁亦盛矣晦
翁之南康舊制呂氏之藍田古事庶幾復覩於今日
禮所謂觀於鄕而知王道之易易者其在斯歟凡我
從事之人各自兢惕無負付畀之重愼守其法勿失
矯揉之方則雞林一域其將一變而復見鄒魯矣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