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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엽 김진영(金振英)의 동약서(洞約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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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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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김진영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형태사항 크기: 21.2 X 16
판본: 목활자본
장정: 四周單邊, 半廓
판식: 注雙行, 上下內向四瓣花紋黑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녹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현소장처: 대구 녹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안내정보

17세기 중엽 김진영(金振英)의 동약서(洞約序)
17세기 중엽 달성군 우록동에 살았던 김진영이 조부인 모하당 김충선이 이미 실행했던 동약에 11조의 약조를 추가해서 만든 동약이다. 이 동약은 『백록동규』와 『여씨향약』등의 조항들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남향약자료집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6
한국의 향교연구, 강대민,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남민수

상세정보

17세기 중엽 金振英달성군 우록리에서 洞約을 보급하면서 지은 동약의 序文
내용 및 특징
17세기 중엽 金振英은 조부인 金忠善의 뜻을 받들어 동약의 보급을 향리에서 시행하였다. 달성군 우록동에서는 원래 김진영의 조부였던 金忠善이 동약을 이미 시행한 바 있었다. 金振英朱子의 『백록동규』와 여씨형제의 『여씨향약』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스스로 조부가 적용한 동약의 약조에 11조목을 더 추가하여 동약을 편찬하면서 모두 힘써서 동약을 실천하자고 강조하였다.
자료적 가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의 향촌질서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양반사족 위주로 이루어졌던 향약의 실시가 점차 하층신분으로까지 확대되게 되었으며, 두 차례의 전란 이후에도 향약의 보급운동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남향약자료집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6
한국의 향교연구, 강대민,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세기 중엽 김진영(金振英)의 동약서(洞約序)
洞約序
人之所以羣居不亂在醜不爭以其有名教而化成
俗定者也在昔朱夫子有洞規以化民呂氏有鄕約
以勵俗爲百世矜式惟我先祖亦有志於此以爲所
居荒僻絕無學文不知禮讓是何物借使無教將自
棄於蠻貊以我東方文獻之邦有所欠缺亦不爲士
君子之所愧恥者乎庸是憂懼乃爲十六條春秋講
訓至今爲里美噫我洞人無親疎長幼宜欽服而遵
行可也敢余倣皇考遺䂓更爲十二條曰約規又加
十一條曰約目列書于左嗟我約中人勿以文具例
視入孝順出忠信尊卑有分長幼有序內外有別交
際有道則鄕里自然敦睦人之所以爲人不外乎此
可不勉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