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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옻골마을 부인동지(夫仁洞誌)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1+KSM-WC.0000.2714-20090831.Y094012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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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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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부인동 동약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형태사항 크기: 18 X 2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63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대구광역시 옻골마을 부인동지(夫仁洞誌)
조선후기 대구광역시부인동(夫仁洞)에서 실시되었었던 부인동향약(夫仁洞鄕約) 운영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망라해 놓은 것이다. 부인동향약은 이곳 출신의 양반 최흥원(崔興遠)에 의해 제정되었고 1739년부터 실시되었다. 이 향약은 최흥원을 비롯한 지역의 양반뿐만 아니라, 인근 동리(洞里)의 하층민들까지 참여하는 향약이었다. 조선후기 양반들은 각 동리별로 하층민이 참여하는 향약을 널리 실시하였다. 그들은 향약 조직으로 하층민을 통제해 나가면서 지역 내 지배질서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부인동지(夫仁洞誌)에는 1850년대까지 본 향약 운영과 관련된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특히 주목되는 점은 향약을 실시한 최흥원이 사망한 후, 향약 운영을 둘러싼 신분 간 갈등 양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양반 주도 향약의 한계를 확인 할 수 있다.
1차 집필자: 정진영, 2차 집필자 : 이광우

상세정보

대구광역시夫仁洞에서 실시되었던 鄕約인 夫仁洞 洞約과 관련한 제반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洞誌
夫仁洞誌
正祖御序, 夫仁洞誌 上, 鄕約節目, 講舍節目, 先公庫節目, 恤貧庫節目, 講會時申約 甲午, 公田碑文, 講堂記, 洞約小識, 營門完文 壬寅, 本府完文 乙卯, 夫仁洞誌 下, 洞民狀 壬戌 十二月, 本家狀 癸亥 正月, 崔氏門狀 癸亥 九月, 鄕儒狀 癸亥 九月, 道儒狀 甲子 十月, 道儒再度狀 丙寅 六月, 崔興濬定配時勘決文案, 道儒三度狀 丁卯 十月, 營關, 本府報狀 丁卯 十二月, 營門決立案 戊辰 正月, 營門完文 戊辰 正月, 門狀 庚寅 正月, 鄕儒狀 庚寅 正月, 洞民狀 甲寅 正月, 本家狀 甲寅 正月, 本家呈營狀 甲寅 正月, 營題到付本府狀, 崔鳳成官庭納考, 夫仁洞誌, 洞民狀 甲寅 二月, 本家狀 甲寅 二月, 鄭允基等納標, 本府完文 甲寅 二月
내용 및 특징
夫仁洞誌는 18~19세기 사이, 대구광역시부인동에서 실시되었던 향약의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부인동 향약은 일종의 동약으로, 이곳의 재지사족이었던 崔興遠1739년에 실시하였는데, 부인동지에는 시간적으로 향약의 실시 단계인 1739년부터 1850년대까지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부인동 향약은 18~19세기 향약활동의 추세에 따라, 일족이 중심이 되어 조직,운영되었던 洞約이다. 부인동 동약의 실질적 실시 목적은 부인동 지역 경주최씨 일족의 족적기반을 바탕으로 한, 향촌지배력을 확고히 하는데 있었다. 일찍이 경주최씨 일족은 17세기 崔東㠍대구광역시부인동으로 이주하며, 이곳에 확고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17~18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사회 전반에 걸친 동요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종전부터 이어져 오던 경주최씨 일족의 부인동 지역에 대한 지위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특히 경주최씨 일족의 재지적 기반이 되는 부인동 일대 농민들의 流離는 이들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따라 최흥원은 우선 농민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先公庫와 恤貧庫를 설치하여 봉건정부의 수탈을 완화하여 농민의 유리를 막음으로써 洞里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 위에 향촌의 지배질서체제 유지를 위한 교화의 방법으로 講舍를 설치하여 향약을 실시하였다.
부인동 동약은 中山里,芹田里,舞山里,夫南里 4개 里, 즉 자연촌락을 포함하고 있다. 부인동은 이 네 개의 자연촌락을 포함하며, 洞約이 실시되었던 洞으로 일종의 별칭인 듯하다. 부인동 동약은 洞約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동약은 洞約尊,約直,里正,典穀이 주관하였고, 官令에 관련된 일은 里任과 公事員을 정해 거행되었다. 이 중 洞約尊의 신분은 士類로 約正 이하를 차출하였고, 先公庫의 稧長을 겸임하고 있었다. 洞約尊은 가장 처음 崔興遠이 역임하였고, 이후 그 후손에게 세습되었다. 約直의 신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上人이나 中庶人 가운데 차임 된 듯하다. 里正과 典穀은 下人 중에서 차임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穀物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동약의 구성원인 約員은 부인동의 全洞民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설립 당시에는 移來民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동약의 구성원인 부인동의 洞民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講堂에 모여 향약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上廳에는 儒品과 嫡孼의 구분을 두었고, 下廳에는 良賤의 구분을 두었다. 부인동 동약 조직의 독특한 내용으로는 先公庫와 恤貧庫 二庫와 公田 설치에 있다. 公田은 流來田五斗落地를 매매한 수십냥과 講會 때, 비용의 일부분을 기본으로 取息하여 설치된 것으로, 이를 경영하여 얻은 수입으로 선공고를 설치하였다. 선공거의 수입은 公稅 납부에 소비되었고 그 전곡은 取息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公稅란 토지에 부관된 田稅로 하층민에게 부여되는 軍伍之用과 閑雜之費 즉, 軍役과 雜稅는 제외되었다. 그리고 휼빈고는 無田地者를 위하여 설치 되어, 賑恤과 葬喪의 부조로 이용되었다. 二庫는 모두 取息 기능을 가지며, 수탈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夫仁洞에서 시행되었던 洞約 자체의 내용은 다른 곳의 향약과 마찬가지로 朱子增損呂氏鄕約의 四大綱目에 의거하여 先賢의 約條와 洞中舊規를 참작하여 時宜에 맞게 改修된 것이다. 부인동 동약 중 특징적인 면은 ‘過失相規’조에 있다. ‘過失相規’조는 上,下人約條를 따로 규정하고 있는데 上人約條의 경우 士族의 무단을 경계함으로써 官權과의 충돌을 방지하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부인동 동약의 경우 16세기 향약에서 보였던 ‘元惡鄕吏’나 ‘吏民間作弊者’와 같이 鄕吏 등에 대한 규제 조항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부인동 동약이 一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이들에 대한 규제가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것이다. 다만 面任이나 洞任의 침학에 대해 官의 完文이나 節目을 통해 보호 받는 정도였다. 下人約條의 경우 다른 향약처럼 가족적인 윤리, 閭里間 相扶相助에 대한 조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服式이나 車馬制에 대한 조항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상하 신분질서의 문란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에 대한 통제와 常民의 경제적 성장에서 오는 신분상승에 대한 규제인 것이다.
한편, 부인동지에 나타난 부인동 동약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향약을 둘러싼 오랜 분쟁 상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초 성립된 부인동 동약은 당시 국왕이었던 正祖에게 알려질만큼 유명하였고, 지방관의 경제적 후원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변동에 따라 동약의 계속적 실시에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동약 조직 내부의 문제로 인한 계층 간의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분쟁의 시작은 1802년 孼族인 崔興濬이 홍수로 무너진 公田碑 중수를 반대하면서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최흥원의 손자 崔湜이 稧長이 되어 동약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공전비의 중수를 위하여 별도의 재물을 취식하고 있었다. 이때 최흥준은 많은 양을 貸付받고 있었으나 拒納하고 있었다. 이에 최식은 동약법에 따라 笞奴의 벌을 시행하자, 최흥준은 公田을 임의로 割取하고 分稧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는 당시 최흥준이 서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 동약이 성립된 초창기부터 지나치게 사족위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세력들, 즉 서얼 및 하층민에 의한 저항이 요인이 된 듯하다.
19세기 이전에 官으로부터 발급 받은 完文에 이미, 洞規를 훼손하려는 이를 경계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최흥준과 이해를 같이 하던 세력 중에는 부인동의 양반이었던 李眞亨처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민 및 面任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최흥원 본가의 호적을 他面으로 移籍할 것과 부인동의 분할을 주장하였다. 즉 동약의 파기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최흥준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1804경주,칠곡,안동 등지의 유림 700여명이 감영에 呈訴를 하여, 최흥준에 대한 엄한 처벌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 끝에 官에서는 최흥원 본가에 대한 他面 移籍과 부인동의 分洞을 명하여 동약이 파기되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파기된 동약은 이후 더 이상 복구되지는 않는다. 이에 1806년에는 다시 700여명의 道儒가 감영에 재차 정소하여 이번에는 최흥준이 嫡孫을 능멸한 庶孼이라 하여 정배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한 갈등은 지속되어 1830년에 崔興濬, 崔鳳成 부자에 의해 다시 分洞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1854년에는 부인동 동민인 李昌振鄭允基최봉성과 함께 분동을 주장하며 그들의 후손까지 문제가 이어졌다. 그런데 동약의 파기는 최흥준 개인의 주장은 아니었다. 先公庫,恤貧庫의 운영에서 나타난 문제가 결국 分洞이라는 공통된 주장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약의 실시를 위해 최씨 일족은 四里를 一洞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는 곧 여타 里民의 잠재적인 저항 요소가 되었다. 거기다가 二庫는 公稅를 대신하면서 어느 정도 농민에게 혜택을 준 듯하나, 공세가 바로 田稅였다는 점에서 양반이나 지주 계층의 이익이 치중되어 있었다. 즉 일반 하층민들이 지고 있던 군역 등과는 무관하였다. 이에 하층민은 二庫에 軍役을 전가시키려고 하였고, 양반층에서는 이를 破約으로 보고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층민의 움직임에 부인동의 최씨 일족뿐만 아니라, 道儒들까지 참가하여 공동대응함으로써 자신들의 향촌 내 지위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부인동지는 正祖御序부터 甲寅 2월의 本府完文까지 모두 3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夫仁洞洞約을 장려하는 1783正祖의 傳敎인 正祖御序부터 夫仁洞誌(李經祿 서문 작성), 鄕約節目, 講舍節目, 先公庫節目, 恤貧庫節目, 講會時申約 甲午 公田碑文, 講堂記(李光靖 작성), 洞約小識(李秉模, 崔華鎭 작성), 營門完文 壬寅 本府完文 乙卯 夫仁洞誌 下, 洞民狀 壬戌(1802) 十二月, 本家狀 癸亥(1803) 正月, 崔氏門狀 癸亥(1803) 九月, 鄕儒狀 癸亥(1803) 九月, 道儒狀(狀頭 李錥) 甲子(1804) 十月, 道儒再度狀(狀首 金鍾運) 丙寅(1806) 六月, 崔興濬定配時勘決文案, 道儒三度狀 丁卯(1807) 十月, 營關, 本府報狀 丁卯(1807) 十二月, 營門決立案 戊辰(1808) 正月, 營門完文 戊辰(1808) 正月, 門狀 庚寅(1830) 正月, 鄕儒狀 庚寅(1830) 正月, 洞民狀 甲寅(1854) 正月, 本家狀 甲寅(1854) 正月, 本家呈營狀 甲寅(1854) 正月, 營題到付本府狀, 崔鳳成官庭納考, 夫仁洞誌, 洞民狀 甲寅(1854) 二月, 本家狀 甲寅(1854) 二月, 鄭允基等納標, 本府完文 甲寅(1854) 二月이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임인년(1782) 營門의 完文 이하로는 동약의 실시에 따른 갈등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료적 가치
부인동지는 조선후기 향약의 실시과정과 운영 형태를 소상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부인동 향약은 족적기반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일가문의 영향력에 의해서 실시된 향약은 주로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洞約으로 조선후기 향약의 추세였다. 부인동지는 이와 같은 동약의 설립 배경과 조직 및 운영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편 부인동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향약 관련 자료와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향약 자료는 향약이 실시되는 배경과 목적이 敎化적 입장에 치중되어 자료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에 반해 부인동지의 경우 18~19세기 약 1세기에 걸쳐 부인동 동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첨부된 여러 공문서, 소송장, 절목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부인동지 1세기 동안 동약의 시행에 따른 士族,庶孼,常民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이에 따른 관의 조치 및 一鄕 사족의 대응 등 다양한 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 있다는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大邱市史』, 大邱市史編纂委員會, 大邱直轄市, 1973
『民族文化論叢』2,3, 朝鮮後期 鄕約의 一考察 -夫仁洞 洞約을 中心으로-, 鄭震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2
『東方學志』46,47,48, 朝鮮後期의 大邱 夫仁洞洞約과 社會問題, 金容燮,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1985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 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정진영, 한길사, 1998
1차 집필자: 정진영, 2차 집필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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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대구광역시 옻골마을 부인동지(夫仁洞誌)
正宗大王癸卯二月傳曰嶺南山川風氣之美最於八
路重以二三先正倡道興學名賢之輩出俗土之敦
厚良有以也近來人才雖不逮古其中讀書之人皆
能步趍端詳言貌恭謹不問可知爲嶺南儒士云豈
非遺風尙存經誦不衰故耶予欲拔其尤以用之特
患未之知也聞前嶺伯言前主簿崔興遠不但有行
誼洞有先公恤貧之庫隣里不知有常賦仍鄕約勸
課云旣聞之後豈可不錄用令該曺陞職調用此人
必欲見之申節上來噫士貴尙志予豈以年祿諉之
哉苐四方之士知予所尙者學行所急者人才則或
有以知勸此予之志也
夫仁洞誌
洞凢四里中山里芹田里
舞山里夫南里
大邱解北村八公山
中即故翊賛百弗庵崔先生施設鄕約之洞也
之五代祖臺巖先生孝廟瀋幸時師傅
崇禎甲申之後自處以崇禎處士隱居此洞之
聾淵上結屋紏俗遺風不衰先生爲先躅之在是
也遂與洞民鬻洞田四五斗地科條立約春散秋
歛一依朱子社倉之䂓行之有年儲畜旣廣則依
張子晝井之制而立先公庫以應一洞之公稅依
周官任䘏之義而立䘏貧庫以濟一洞之貧窮旣
又謂之曰先富後教古之道也於是立一齋曰講
堂歲以春秋約日齊會士齒于堂民列于庭相與
塞喧問疾苦訖輒以藍田鄕約忝以時宜而著
爲節目通讀曉諭申之以孝友睦婣之道治田營
家之業因擧善行及過失者以行賞罰乃設酒二
三行獻酬拜揖如禮而罷居是洞者無不心悅誠
服翁然從化至有男女異路頒白不負戴之美故
前後邑侯方伯諸公聞輒稱賞或賛助於立約之
初或完文於定規之後又以是登聞于朝粤在
正廟朝特下嘉奬之教因命道臣謄上洞約
一冊領府事李公秉模之按節也捐營耗五十包
以屬於洞文以識之此洞約剏立之大畧也遂爲
洞誌一卷使事實規模一擧備見以爲永遵勿替
之地云碧珎李經祿謹書
洞約節目
一曰德業相勸
事父母盡其誠孝
教子弟必以義方
尊敬長上
和睦鄰里
友愛兄弟
敦厚親舊
待妻妾以禮
接朋友有信
立心以忠厚不欺
行己必恭謹篤敬
見善必行
聞過必改
至於讀書治田畏法公謹租賦之類皆宜自勉
下人徒知愛父母而不知尊敬尤不閑拜揖之
禮事父母不可不愛敬兼至少者遇老者長者行
禮必敬負戴必代儕輩相敬鄰里相和呈訴爭訟
割耕占畔等事一切勿爲以長忠厚之風凢同約
之人上下各自進修互相勸諭會集之日相與推
擧其能者如有卓異篤行約直告于洞約尊約尊
報官論賞
二曰過失相䂓
父母不順者【不孝之罪邦有常刑故姑擧其次

兄弟相鬪者【兄曲弟直均罰曲直相半兄輕弟重
兄直弟曲只罰弟

家道悖亂者【夫妻敺罵男女無別黜其正妻嫡妾
倒置以妾爲妻以孽爲嫡孽反凌嫡

【嫡不拊孽

事涉官府有關鄕風者
妄作威勢擾官作私者
侵暴小民私門用杖者
鄕長凌辱者
已上極罰
上告官科罪不通水火
中削籍不齒洞里
下損徒不與洞會
親戚不睦者
正妻踈薄者
鄰里不和者
儕輩敺罵者
不顧廉耻汙毁士風者
恃强凌弱侵奪起爭者
無賴作黨多行狂悖者
公私聚會是非官政者
造言搆虛陷人罪累者
患難力及坐視不救者
受官差任憑公作私者
婚姻喪祭無故過時者
不有執綱不從洞論者
不服洞論反懷仇怨者
執綱循私冐入同叅者
多接人戶不服官役者
不謹租賦圖免徭役者
已上中罰
上告官科罪
中下從輕重施罰
紊坐失儀者
座中喧爭者
空座退便者
已上下罰
上中下面責施罰
不養父母使之丐乞者【以下下人論罰

不順父母多行悖惡者
女人誶罵舅姑者
兄弟不和者【相鬪則曲直依上條論

衝火作孽者
兩班凌辱者【兩班以非理取辱則亦論罰

有夫女潜奸者
傍親祖叔兄弟凌辱者
已上極罰
上告官科罪不通水火
中下從輕重施罰
恃强肆暴作害閭里者
以少凌辱老者
鄰里不和及相鬪者
絲笠細衣紊亂名器者【濫乘轎著唐鞋

兩班等馬者
不力其業惰農自安者
行止唐荒人作主者
遊女相奸作亂傷人者
已上中罰
上告官科罪
中下從輕重施罰
吉凶扶助不如約者
公事時托故不隨行者
閭里間高聲叱辱者
聚會時使酒喧爭者
已上下罰
上告官科罪
中下從輕重施罰
同約之人各自省察互相䂓戒小則密䂓
之大則衆戒之不聽則會集之日約直以
義理誨諭之謝過請改則許其自新其爭
辨不服與終不能改者告于洞約尊約尊
報官司分上中下三罰治之
三曰禮俗相交
年長以倍則父事之十年以長則兄事之五年以
長亦稍加敬父之執友則拜洞內年長十歲以上
拜鄕人年長十五歲以上拜遇尊長下馬過公門
下馬洞人會飮處下馬會射處下馬
凡聚會洞人坐以齒非士類則否若有親則別序
雖有他客猶以齒有異爵者坐以爵若特請召迎
勞出餞皆以專召者爲上客如婚禮則姻家爲上
客皆不以爵齒爲序
約中冠子生子登第進官之屬皆可賀婚禮雖曰
不賀禮有賀娶妻者但以物助賓客之費若下人
則否如有來助又不必郤
四曰患難相䘏
約中有喪上下齊會徃吊定護喪有司一員【勤檢

【信實人
】副任二人【年少明敏者
】以護初喪葬時有
司率二副任於喪家近處別設所供辨【自洞約出

【白米十斗蔬菜價米一斗太六斗醬價太一斗
】當
日朝夕餉擔丁雖升米一蔬侵索於喪家則有司
以不能推孝論笞罰或有徵索酒肉者以犯不孝
論不許會葬列喪人或用酒肉接人無禮者論以
不謹居喪置以重罰各出役夫一名或擔持或造
墓若人戶盛夥處一喪所用似不必盡出役夫量
數出給餘數則他喪計給下人喪則令約中齊會
徃吊定下有司二人護喪凡上下喪發引送之返
魂則迎卒哭大小祥皆吊之每歲十月收空石二
葉每戶別爲藏置使里正行首次知有喪則量宜
出給又以長木葢草治殯惟父母喪當身妻喪外
其餘否
約中有火灾上下救且助之各出空石葢草長木
同力造家【雖非火灾約中若有作舍出牛馬運材

【助役若非正室否
】有盜賊則相救疾病則相問若
癘疫不能服田則約中通上下各出農軍或耕或
種或耘或穫鰥寡孤獨廢疾無依者幷可矜䘏不
至失所處女貧窶過時不婚者孤兒單弱失學無
歸者幷報官司或自約中通議善處
講舍節目
一約中擇有德行者一員爲洞約尊非士類則否又以
淸勤一人爲約直擇下人中愿謹有識老者一人稱以
洞約所里正以饒實淸勤者一人稱以洞約所典穀
專掌勸誘紏檢出納穀物事
一約直以下之任差出駁遞洞約尊爲之洞約尊有
過隨事論告以俟遷改若色勃言不恭者論以不有
執綱而猶施所告事
一洞約尊約直及洞約所里正典穀則只管洞約勸
䂓交䘏以正洞俗而已若係關官令事則別定里任
公事擧行事
一約直以下任經春秋講會後改之而或其人可合
不必嫌久事
一約中有善者書之書之至三奬嘉論賞若忠孝友
愛者則洞約尊詳察又得洞人咸可然後告官許座

一論人勿爲己甚且開自新之路約法以前事幷勿
追論事
一依古鄕約法移居則落案重罪則報官永黜輕罪
則自洞中論斷而笞三十以上官決事
一每年春三月三日約直使洞人咸集講堂爲上廳
一下廳一【上廳有儒品嫡孽之別下廳有艮賤之別

各用年齒坐定後別定知文字者一人中坐抗聲讀
洞約一遍【只相勸相䂓相交相䘏四條
】諺語解釋使
人人無不聽聞通曉因設酒二三行而獻酬拜揖如
禮後罷秋九月九日亦如之事
一春秋講信時上下老少講論言語之際須以忠厚
有益之事不得輒道神怪邪僻悖亂之言及私議朝
廷州縣政事得失及揚人過惡違者約直紏之事
一近來常漢謀避分內之役希望分外之任或無端
移徒或乘時逃去極爲塞心旣叅洞約又經講會之
後若有如此行止之人里正摘發通于洞中告于洞
約直及洞約尊具由告官知委約中人使不得買其
田土以長其忠厚守分之風事【此死徙無出鄕之義

一諸般節目洞約所里正申申通諭於下人老少使
無不知者可免罪責事
先公庫節目
一稧任擇上案中忠信淸勤者一人爲上有司又擇
下案中饒實淸勤者一人爲公典穀而兩任差出洞
約尊爲之事
一穀物以洞約所除出別藏謂之先公庫而洞物一
歲費用後又有所餘隨多小歸之先公庫逐年如是

一穀物歛敢略依朱夫子社倉䂓嚴立保授法典穀
先執保券然後出穀物敢盡後以其券封納于有司
藏之洞櫃待秋出給與穀畢捧後去其券事
一保長保副必以洞中稍實有根著者聽許出債
人或逃有躱保長副當之事
一春講會時上有司以穀物禀于洞約尊公典穀聽
於有司而出給秋講會時典穀受券於有司畢捧後
以文書磨勘於有司而封庫不得自擅事
一約中田結不過五六夫有餘則百斛之穀可以助
其不給矣須皆齊心用力數年長息歲可剪息百餘
斛然後即以十三出息以便歛散兼濟約中人事
一歲飢則弛半息大歉則盡蠲其息只收其本以惠
約中人如社倉規事
一約中之人每思名庫之義各自以先公後私爲心
秋穫之後輒先公家之入毋或後於他洞則庶不負
立名之義又不犯洞約中不謹租賦之科事
一凡食穀物無故不報者自洞約所著圖書具由告
官請治懲捧事
一書員看坪執卜時愚民易受欺弄之患公典穀惕
念審愼及其作夫之日約中民結謂之公結而成案
俾無一毫違繣相左事
一春稅出秩後公典穀量公結所應之數自先公庫
辦出盡捧後尺文納于洞約直以爲憑驗之地而苟
愆期遲慢則公典穀從輕重科罪事
恤貧庫節目
一先公庫旣成約中有田土而應稅役者皆蒙蠲減
之惠其中無田土者獨不能被其澤故特設此庫買
給多少田以爲䘏貧之地事
一抄約中貧殘無土田者若干人列姓名成案先計
田數多少次看貧勢緩急以爲上下分給而不定其
數事
一買給田土時特思任䘏之意毋或干私於其中以
傷軆仁之道事
講會時申約【甲午

各守分業
分【父子兄弟兩班凡民

業【讀書謹身耕織以時

養親奉公
養【一衣一食必先父母不敢不是惟悅親心

奉公【一謹租稅相濟貧竆勿以富貴相加傷害

公田碑文
此洞最深僻居民朴愚無詐我先祖臺巖先生甲申
以後隱居聾淵上紏檢民俗遺風至今不衰不肖孫
興遠又爲洞民齊懇復修舊約叅以時宜立約聞官
歲一會講以明人皆有愛親忠君之秉彜然顧無自
修之實又無先富之制變化民俗蓋不可易議况此
洞水田多土不宜綿民不業織而以達城一邑通爲
宜綿之地民夫稅役皆出於綿獨此一區不可以綿
貴有異則農民秋收太半爲稅役之費雖樂歲不免
於催困而不勝其飢塞也余乃約約中之饒者謀所
以先公便民之道鬻洞田一叚得數千錢又以講會
用餘別儲逐年保長剪息買土至數十年所買水田
近百餘斗地儲租近數百斛名其田曰公田庫曰公
庫即以此當約中民夫稅役此殆取井田中百畝爲
公田之義也於是催租之吏不入洞民得以安向之
飢塞者今或有衣食象情咸樂肯受所教古聖所謂
先富後教良以是也然人情患終怠美蹟恐易泯遂
就講舍下特立大石磨其面以事實刻圖所以永久
噫約中上下人後孫苟能以今日之心爲心顧名思
義一心奉公毋敢干私則庶幾爲家之能子國之良
民不然當不免於悖子奸民之律矣各宜勉之哉
弗翁
講堂記
自夫井地之法廢而兼幷之術作焉先王所以教民
善俗孝友睦婣任䘏之道蕩然無復影響之可尋
以降千有餘年非無英君喆補慨然有意於矯革
而不救其本而惟末之圖架漏牽補過了時日則雖
曰人之秉彜好是懿德而入而無養育之資出而無
禮際之交其於鱞寡孤獨又無維持周䘏之具則其
營營於朝暮者不過一已情欲利害之私而已夫豈
世道之自下哉其教使之然也此諸夫子有意
於三代之治而必以經界爲仁政之始也噫井地之
雖不可復見於今日而有志之士又豈無遷就於
法度之中而以寓其相親相愛救灾恤患之教之術
乎㓒溪百弗翁崔公蓋甞有意於修己治人之學見
於言行施於家庭者駸駸乎古人敦睦之風者而又
欲推而及於人人以夫仁一洞僻在山峽之間而民
俗淳樸若可以教焉於是約一洞人畧依朱夫子
之規而立一稧取息若干穀歲歉則弛半息大歉
則盡蠲之行之數歲稍稍有臝餘矣於是招洞人而
告之曰是洞也土瘠而民貧每當徵稅之際輒有蕩
柝之患豈徒關生民之大命抑非尊上奉公之道今
以所儲之物度一洞民田租稅之數先輸於公家何
如僉曰唯唯遂名其庫曰先公旣又曰洞人之有田
者已蒙惠矣孤貧無依者獨無振濟之道則豈吾今
日同稧之意遂抄洞民之無田者若而人買田以界
之名之曰恤貧旣又謂之曰逸居而無教則近於禽
獸此古人所以旣富之而必教之也今旣贍於奉公
惠於貧窮則不可不汲汲於導迪之方於是立一齋
曰講堂歲以春秋約日齊會士齒于堂民列於庭相
與道塞喧叙情素問疾苦訖輒以呂氏鄕約之法申
申焉此夫仁一洞規模之大畧也自是以後處於
仁之一洞者不憂於飢寒不迫於租稅惟從事於治
田營家之業暇日則相與講相勸相恤之道是則非
井田而寓井田之法處季世而存三代之風也余甞
一至是洞洞人相與頌百弗翁之德又欲得一言以
記於楣而示久遠余惟此橫渠子之有志未就者而
百弗翁能成之何其幸也一洞之人與被君子之化
而至於有成如此又何其幸也然是洞之人其無以
成立之幸而忽夫保守之難覩先公之名則知尊公
奉上之道出於秉彜而無間於山野念恤貧之義則
知吾兄弟之無告者而彼之飢塞猶己之飢塞也讀
講堂之規則識人之所以爲人在於德業而不可一
日而離乎此也父詔兄勉傳子及孫勿替引之則豈
非幸之幸歟若其洞約規例自有百弗翁舊誌玆不
復著云壬辰三月日韓山李光靖
洞約小識
余持嶺節旣赴營先問邑俗三十三坊均之有勤儉
之風而惟夫仁一洞最能親親焉長長焉蔚爲諸
坊之標準蓋自通判以至吏校村父老莫不云然余
於是乎不問於人而知其爲隱德君子之所盤旋也
旣而得夫仁洞約一卷盥手而讀之始知其親親長
長之所本而向所謂隱德君子之所盤旋者果不違
余料也百弗崔公篤學力行至老不倦以其修齊之
餘畧示經濟之具以富教爲本領以講信爲節文以
警罰爲律令燦然數條之間導民化俗之大旨備矣
然其所以爲教不越乎親親而長長親親仁也長長
義也其曰先公之庫者義之推也其曰恤貧之庫者
仁之推也仁義立而民安得不齊俗安得不淳也擧
達城之大而推夫仁爲最者豈無所以而然歟嗚呼
以公之志大其展布則可以均田制祿可以敦風範
世而顧乃歛此大惠局于一鄕今幸遭逢聖明屢
勤徵招而公又病不能自力矣在夫仁則幸矣豈不
爲世道恨惜也歟公之從子華鎭甫不鄙余之固陋
辱與之遊見輒贈言可謂不忝家訓愛人以德者也
要余數語於卷中蓋以余曾以附驥之願薄效捐穀
之助謂宜與聞於是書也洞約㒹末小山李公記之
已詳矣獨以其爲世道恨惜者書而復焉歲甲辰
月上幹德水李秉模
李領府事先生從子華鎭書曰社倉之制三復記
文不勝欽嘆如使其制遍行減中則何憂公糴之病
民荒歲之㒹連又何必別設賑救之政也秉模先祖
文敬公以此事前後力言于朝縷縷數千百言亦甞
頒下節目而議論不一寢而不行乃於所居砥平
山中設置社倉春散秋歛畧依朱夫子舊制鄕人便
秉模弱冠時猶及見其倉社規模間値荐歉又無
承述之人今爲廢已久矣每覽遺集未甞不悼嘆於
斯此所以欽誦不置於夫仁洞規者也姑先以五十
苞租奉助倉儲非執事之有求於秉模秉模亦非有
私於仙庄也誠以所感者深故耳
營門完文【壬寅十二月初二日

右文爲完護事鄕之有約呂氏之古事尙矣而世級
漸降習俗澆漓鄕閭之間不復聞修明此約者久矣
惟此夫仁一洞處在儲地一變樸陋之舊習申明善
俗之美制買土以應貢賦殆同周俗之公田出穀以
濟貧窮無愧文正之義倉而以至闢立家塾申之孝
悌節次条列旣嚴且詳此若悠久而無替則藍田之
約不獨專美於前矣然而歲月寢深人心漸薄則壞
規毁制之徒安知不出於其間此夫仁民所以旣刻
于石又欲經官者也嗣後之圖約有約長官有官長
雖有忮忌之類安敢沮敗恪守約條永久遵行宜當

本府完文【丙申十二月日

右爲成給事夫仁一洞百弗庵崔公講學經濟之
地而藍田鄕約之節橫渠畫井之規兼備俱得垂惠
一方故九重嘉奬之綍三營完文之蹟已成百世
不刊之典而今見本洞所在洞約冊子則其曰洞約
所任掌則只管洞約勸規而已若係關官令事則別
定公事員擧行云云此亦呂氏之遺法而在本洞行
之百年者也前後節目題辭備悉申勤而竊念歲
久人遐則難保無意外之弊故洞約所諸任掌叚勿
干官事之意更成節目爲去乎依此永遵勿替宜當

本府完文【己亥正月日

右爲完文成給事夫仁一洞百弗庵崔公經濟之
地而先公之庫恤貧之倉實倣藍田鄕約之規張子
畫井之制至蒙朝家嘉奬之教故前後營府次
茅完文一以杜分洞之弊一以禁軍役之侵而近聞
洞中若而輩先倡分洞之說以軍役之費敢侵於二
庫云極爲駭然盖分割一洞則井制自破矣軍役橫
侵則二庫亦破矣豈非慨然處乎玆以依前合洞之
規軍役勿侵之意完文成給以爲永久遵行宜當者
本府節目
夫仁洞約乃儒賢經濟而朝家奬許則其所敬
重尤爲自別而前後營府之軆念愛護靡不用極百
世遵守毋敢失墜事
一先公之庫乃豳民雨田之義而公稅責應自有定
式則當春劃給之後毋敢疊徵於秋糴事
一恤貧庫乃周官任䘏之義而隨勢緩急亦有定式
歉歲分賑之時毋敢分外希覬事
一先公恤貧二庫所係旣爲重大而經用各有定例
依前日營府完文凡軍伍無亡之役民戶自當之資
毋敢橫侵於二庫事
一洞約里正二庫典穀乃是約中任掌則依古時鄕
約營府完文凡係官事之擧行者勿爲侵責事
一四里自是一洞而以一洞不可分二之意已有前後
完文及決立案永遵勿替毋負先賢之美規事
一盖此洞約自有約長凡係約中紏檢之事一依節
目以聽約長指揮而如有不遵約條者當有自官
嚴治之道事
本府完文【乙卯正月日

右爲成給事夫仁一洞即故翊贊百弗菴崔公講學
經濟之洞而先公恤貧之庫勸善懲惡之法實倣
田鄕約橫渠井制與夫朱夫子社倉之規故至蒙
正宗朝嘉奬之綸綍繼而有前後營府完護之文
已成百世不刊之典而二庫之凡干經用自有條例
以爲永久遵行之地矣即聞春賦秋糴時本洞頑民
若而輩故意拒納而符同於面任洞任以致該庫疊
徵之弊噫先公之庫旣以應洞民惟正之供則今又
以還上錢邊疊徵於約條之外者萬萬駭然是遣洞
任與面任則稱以該洞拒納而符同奸民任意橫奪
者又豈非痛駭處乎此而不禁則儒賢經濟之美規
先朝眷注之至意將無以遵守矣玆以完文成給
爲去乎自今以後面洞任與奸民輩更或有如前疊
徵之弊自約中告官嚴繩是遣至於時作之懲卜者
當依舊規則爲移作俾爲永遵勿替宜當者
夫仁同誌下
先生易簀之後先生之孫崔公湜無忝先訓遵守
舊規而同約之中有孽族崔興濬者多犯洞物反
欲破約先賢美蹟蕩無餘地故洞民之狀出焉本
家之狀次之門狀鄕狀次之以至道儒累次呈營
凡首尾六年剖破奸狀嚴刑遠配永削洞案然後
洞約始得如舊此前後訟卞之大畧也遂列錄文
券如左廣陵李憲運謹識
洞民狀【壬戌十二月

矣洞僻在竆峽氓俗蚩蚩何幸崔翊賛進賜主與洞
民設行鄕約先公有庫䘏貧有儲講會有堂此罕古
之美蹟而至蒙朝家之褒奬遵守百年而無弊矣
不意本洞居崔班興濬多犯洞物兩庫錢一百八十
兩穀四十石呑食已久洞畓十六斗地又自擅奪累
次徃推終無報償反以荷杖之計先呈誣狀噫此洞
之所重自別而右班之勤奪如是若任其所爲則百
年舊約毁破無餘玆敢仰訴云云
題曰汝所謂崔班率來事
本家狀【癸亥正月

伏以日前夫仁洞民以崔興濬事已至呈卞民忝在
約主當爲前列而事係族親不忍遽事爭訟今渠已
先呈洞人繼發至於推卞民揆以公私進退兩難然
事係先蹟所重自別則不敢終事泯默伏願城主試
垂察焉此洞即民之先祖臺巖公隱遯之地也紏檢
民俗頗有遺風民之祖翊贊公重修舊章立約聞官
盖其設立之初鬻洞田一段僅得數十緡錢與洞人
上下協力長息而興濬之祖壽元實同其事就其措
畫之大者而言之則有曰先公庫者洞人惟正之稅
皆出於此而取諸井田之義也有曰恤貧庫者洞民
之無田者有以資焉而取諸均田之義也於是立一
堂春秋講會申之以孝親忠君之道尊公奉上之義
則取諸鄕約之法而參以時宜也其法以不紊綱紀
爲主而實爲傳世之美規故向來朝家之褒典
府之顧護靡不用極而今乃以民不肖致有興濬
事美蹟將毁民之所以反復而自咎者也民之祖父
慮夫人心之易怠美蹟之易泯有如今日之事者就
講舍下特立大石刻其事而題之曰洞約公田碑洞
民爲之愛護立屋以庇風雨年前爲大水所圮毁更
謀重建而重傷公物有多小拮据者數年矣昨年正
月始營匠役而幹事之責民不敢辭遂期日聚財則
洞民所掌一一如約至於興濬所貸居其太半而一
不捧納畢竟賣公田而用之夫以人心之不同而不
有警罰以一之則將何以守成乎所以約中有犯如
此之科者例有紏正之法不可以族親之故而全然
容貸參酌公私畧施笞奴之罰盖謂其祖之孫而同
約之法不敢不施也彼乃陰懷怨毒無所顧藉以先
公之碑而謂將毁破以先公之畓而任自割取從前
許多所貸今年秋收從心所欲兄弟分執名之曰分
稧噫此洞之物出於鬻洞田而爲基則旣無所合何
以言分民忝爲約主責在紏檢彼之不善民之過也
明政之下固難逃罪而苐可痛恨者爲先蹟之將毁
也人無恒產必無恒心此弊一開民無所頼則安知
無幾箇興濬生於其後而洞隨而亡也伏願特加明
卞使夫仁洞民永頌今日之惠千萬祈懇之至
題曰其在睦族之義相與和解無至更呈則諺所謂
官村無事知悉
崔氏門狀【癸亥九月

伏以民等世居此土宗族寔繁其所以講敦睦而處
恩義者必欲務其和平戒其乖激不以支庶之微賤
而有所或蔑不以卑幼之藐末而有所或忽苟有過
失則諄諄規勉使之潜消暗融惟恐人之或知何嘗
發之文字登之官司以暴揚其罪乎此乃近故翊賛
百弗庵崔公之所嘗垂訓而作爲家法者也民等竆
居草澤無所肖似而唯能謹守其法不敢墜失矣今
有孽族崔興濬者不幸近出乃於翊贊公所設鄕約
深懷娟嫉圖欲毁破先旣搆誣呈訴後又撞破櫃藏
偸出文案所以侵侮汚衊者無所不至蓋其負犯不
少關係甚大旣難以言語諭之又難以骨肉待之則
不可不一訴法庭以聽處斷玆敢仰籲是豈民等之
所欲哉伏願城主試垂察焉惟我翊贊公粤在
朝以學問行誼生而膺桂坊之選歿而蒙銀臺之
贈世所稱百弗庵先生者是也公
之先祖臺巖公孝廟赴瀋之時薦除師傳即起追行行至
龍灣而不能及焉則痛哭以返遂入公山夫仁之洞
自處以崇禎遺老而隱約以畢世公以其先祖遺
捿之地而甞徃來其中深愛山水之幽邃民俗之淳
朴遂結社修稧設行藍田鄕約法而又取張子畫井
之義朱子社倉之規以增損之首立先公庫次建䘏
貧庫使公賦無所欠民產有所均而凶荒饑侵賑救
之策畢擧鱞寡孤獨凍餒之患永絕一洞之民無不
心悅誠服薰然從化至有男女異路頒白者不負戴
之休則當此之時宛然有三代遺風者惟此洞爲然
公甞磨崖刻文以爲不刊之蹟而小山李公之記領府
李相國之跋載在稧券赫赫若昨日事惟其然也
故是洞鄕約之法名於一世以至於上徹九重自上
特命道臣謄上一秩又於筵中有教曰如此之
人不可不見必使强疾上來夫以嶺外之竆巷僻峽而
有此隆厚之恩數者豈徒爾哉今其良規美制足
以敦民彝而裨世教嘉謨懿範足以垂後則而起末
俗則宜乎在上之眷眷注擬必欲傳諸久而行諸遠
也雖使行路之人過而見之猶且想像感祝愛惜而
不忍傷庇護而不忍毁况公之洞人乎公之族子乎
惟彼興濬獨何心腸跳踉作挐肆行胷臆必欲甘心
於破毁然後乃已也且興濬之乃祖乃父罔不致心
用力於是洞之事若使化者有知其肯曰余有後乎
以公言之則黈纊之所經也而敢欲毁之是得罪
於邦憲也以私言之則父祖之所服也而敢欲破之
是得罪於先靈也以其沴毒之性有此乖敗之行規
之而不悔責之而不悛敦睦之道有不可施也恩義
之情有不可全也到此地頭又焉有宗族之可論哉
圮族敗類旣有詩書之警訓誣人亂民亦有刑律之
嚴典民等之有此擧措但不可已伏乞城主詳察夫
仁洞立約之規嚴治崔興濬作乖之罪使先輩之美
蹟得以永保後日之弊習得以嚴懲千萬祈懇之至
官以爲興濬負犯死有餘罪莫如待渠自首而勘處
之爲宜遂留狀不題
鄕儒狀【癸亥九月

伏以愛護美蹟秉弊之良心嚴誅惡習公共之輿憤是
故後人之於先輩其所以欽慕而尊尙之者雖在草
木土石之微無不愛惜藏護不使無良之人有所傷
毁苟或有之則齊聲群起懲討之不暇况其嘉謨美
規之足以垂後則而範末俗者乎惟我本府北八公山
下有夫仁洞一區而近故翊贊百弟庵崔先生甞行
鄕約法於其中行之旣久恰有化興俗成之美矣不
幸今者有所謂崔興濬者乃先生之孽族而敢生毁
破之計先則作挐洞規割奪田土後又撞破櫃藏偸
出文記因以肆行胷臆侵犯汚衊於百弗先生者無
所不至此雖跡若涉於財利而罪實關於風教民等
輿憤所激不勝痛惋玆敢聯名仰訴于按法之下伏
城主細垂察焉恭惟先生學問精詣踐履篤實
德行道義菀爲先朝之徵士卓爲後學之宗師雖其
賁趾林泉未能展布於當世而胷中所蘊畧綽呈露
夫仁洞一區可按而徵矣先生甞愛是洞之民淳
俗朴與之結社修稧而春秋會講相勸相規呂氏鄕
約之遺法也置田制產先富後教張子畫井之遺制
也若夫先公有庫恤貧有廳使其征賦無所欠而凶
荒有所救則朱子社倉之餘意也一洞之民心悅誠
服翁然從之遂至男女異路頒白者不負戴而宛然
有三代之遺風矣夫如是故粤在先大王朝道伯
繡衣以是薦之大臣鄕宰以是奏之特有桂坊
選而恩數便蕃寵遇之殊渥隆摯旣使嶺營
上洞約一帙以備乙覽而又有筵教曰如此之人不
可不見使之强疾上來夫以公山之最深僻處而得徹
於九重之淸燕者是豈非地以人名者耶然則是
洞之一畒一頃一丘一壑罔非曾經睿覽中物事而
崔先生所自製磨崖之碑李小山講堂之記李領府
之券末跋語輝暎洞門照人耳目有非么麽輩之
跳踉作怪者較然明矣噫尙德好懿人所固有雖在
百世之下千里之遠猶且想像感慨徘徊而不忍舍
况民等俱以百弗先生之鄕里後生世之相距也不
久地之相接也甚近則其所以爲之地者豈但與千
里百世之相間者等哉甘常嘉樹不過一草木也醉
石鍾墩不過一土石也而當時之愛惜後世之藏護
如是其至也則惟此三代之遺教百年之美蹟忍使
一箇興濬任其作壞了耶張子畫井之議胡文定不
欲其埋沒於後世朱子社倉之規王承相必請其頒
布於諸路此盖君子成人之美之至意也若使當時
苟或有毁畫井而破社倉者則關中諸子金華多士
其忍立視而無一言以爭卞乎雖以我朝事言之
德山書院之藏獲土田任員之所職也塞岡先生
區處文書私家之所幹也而一道章甫齊會呈訴以
正其偸竊搆誣之罪蓋事係風化罪關斯文則不可
委之於財利之微而有所不屑者當如是也民等此
擧質之古昔而無愧證之本朝而有據其在奉
國法任世道之位者宜必有所動念於斯矣伏乞城主
取考洞約捉致興濬嚴治處分一以永保先輩之美
蹟一以深杜奸民之弊習千萬幸甚謹冒昧以陳
狀頭幼學朴聖洙狀下幼學蔡師穆都述謨趙復奎
徐惟行生員李鼎五幼學都必洛全邦赫李性五
運奎徐00004都格模都必中郭利澤柳養善孫養坤
徐寬復趙煥奎全邦顯都必貞進士徐弘復幼學
鎭復具樟孫敏錫孫養澍都暹圭孫禹錫李錫驃
光夏朴光濟徐龜浩都墩徐00005徐橚都必毫楊泓
達臣李錫駿徐永浩徐而復朴光正李奎瞻都賢謨
徐賛復趙宅奎進士李元燮幼學朴基明朴基弘
廷圭徐麟復孫養孝孫養燮幼學徐文玉郭柱寅
柱基朴基拓朴基植朴基大孫養元夏時賛
道儒狀【甲子十月

伏以生等竊伏聞鄕校欲毁而子產請禁嘉樹起咏
而宣子願封盖以先代之美制不欲其遽撤善人之
遺蹟不欲其終泯是知好懿之心出於秉彜辨慝之
政關於風化自古及今其義一也今有賢人君子之
良規美蹟足以扶世教而補聖化遺風餘韻足以
感人心而堅民彜而一種怪鬼之輩出於其間肆其
感人心而堅民彜而一種怪鬼之輩出於其間肆其
胷臆恣其誣毁必欲打破而後已則苟有彜性孰不
投袂奮起搤腕齊聲而况乎任世道之責操風化之
柄者其忍無赫然動心者乎大邱居近故翊贊百弗
庵崔先生乃先朝之徵士後學之宗師而懷道抱義
賁趾林泉雖其所蘊未能展布於當世而一二施設
亦足以驗平日之經綸矣何者八公山下有洞曰夫
仁林壑幽邃泉石淸奇盖先生之先祖臺巖公隱遯
之地也臺巖公孝廟瀋幸時師傳聞命趍赴
行到龍灣度未能及則痛哭以返遂入此洞搆小亭
名曰聾淵自處以崇禎遺老而終身不出世焉先
生爲其先躅之在是也與洞民結社立籍世所稱夫
仁洞約是已夫是約也取藍田鄕約之規橫渠畫井
之議與夫金華長灘社倉之制先立先公庫使一洞
公家之征賦無愆期違時之患此則豳風雨田獻豣
之義也次置䘏貧庫使一洞無田之貧窶無塡壑捐
軀之憂此則周官任人䘏隣之義也乃又立春秋講
會之堂會上下分老少申之以孝友睦婣之道勵之
以賞罰勸懲之法洞之人無不心悅誠服教行俗
成至有男女異路頒白者不負戴之美則公山一區
宛然有三代之遺風矣猗蘭之幽香出谷臯禽之翰音
登天九重恩遇前後便蕃十行褒綸左右輝暎則
當世之艶慕而興起行路之指顧而咨嗟盖已久矣
而至若洞約之始終㒹未則先生所自製磨崖之碑
李小山講堂之記李領府事洞約之跌可按而覆也
及其先生易簀之後洞無他人可以看詳其事而先
生之孫崔湜文雅馴飭恰有家風洞民遂以承述之意
推其主檢之責其所以撫摩紏率一遵其舊無或失
墜則可謂無忝之兒而克肖之孫也不幸同約之中
有孽族崔興濬者素以懻忮之性又懷娟嫉之心其
於錢穀之出納期會之早晩弄詐作奸多所負犯及
其情節旣露形跡莫掩則齮齕之搆捏之甚至於誣
呈官庭割取公田撞破洞櫃偸出文案末乃陰嗾洞
民之無頼輩裴迪載張啓成六七人以十條謊說搆
崔湜逼斥先生姓諱所載之戶籍又使面任慫惥附
近里之殘敗無餘者遊辭瞞報分割聾淵亭所在之
洞以屬於他里則興濬之精神骨子都在於角立
毁破洞約之計也噫彼興濬者亦人耳由其父祖
以上初皆竭力盡心於先生立約之日而乃以其子孫跳
踉咆哮使近百年已行之成憲片片破碎者抑何心
哉此必有同惡相濟之人蛇盤蚓結雄唱雌和以至
於是矣惟其吉甫之賢焉而未察繫蜂之讒曾毋之
慈焉而亦起投杼之疑下稍之一番懲勘但出於調
停濟和而止焉則此所謂君子之可欺以其方者也
雖然以灸德薰化之遺黎而恣其戶籍之敺逐以修
稧結約之賢坊而任其井里之分割則反噬之惡慘矣
自毁之罪極矣一事仁恕俾售其計者是豈齊之以
禮之意耶今夫崔湜之無限被毁揆以愛護文正家
之義宜亦有同類之齊憤而猶屬一已上私事姑舍
勿論而至若洞約之毁破與否則其所關係者大矣
百年之嘉謨可以扶植世道先王之恩褒可以淬
勵人心而忍使么麽一小孽任意作壞了也則其在
在上仁人之心果何如也屋上之烏一微禽也而愛
其人則猶不忍打起廟前之栢一古木也而慕其人則
亦不忍毁傷况乎賢人君子之苦心經營以寓山林之
經濟者不但如屋烏廟栢之無所關係於人者則惟
此洞約之不可遽然毁破者較然明矣夫以周公
制禮作樂歷世旣久之後且不免有弊而崩壞則興
廢有數成毁無常固其理也苐伏念生等幷世生長
或有操凡及門者或有聞風私淑者無不目擊於遺
芬之地足躡於播馨之所則拊跡興懷有如隔晨事
耳好懿之良心自激辨慝之嚴典有在則生等今日
之呼籲但可已乎昔朱夫子婺源之舊址考亭之遺
墟或爲勢家之所奪或有豪右之所占而初有五代傍
孫朱光之呈卞又有元明間賢士大夫之上聞而追復則
擬議之際雖有大小輕重之或間而後生之所以尊慕
先輩者何間於古今遠近之分乎今我相國閤下膺
旬宣之寄任風化之責環嶠嶺七十州凡所以勸懲黜
陟之權無不專焉夫所謂政不出於庭戶之內而風自動
於湖山千里之外者即此事其首也噫惟此夫仁一洞
公田割則洞約破矣戶籍逐則洞約破矣本洞分則
洞約亦破矣神奸鬼物豈能遁形於九金之鑄而造
言誣人亦豈逭於八刑之科哉玆敢以輪音及碑
記跋所載洞約一冊齋沐賚裹齊聲仰諭於棠陰之
下竊念皮之不存毛將焉傳草之將祛根必先發伏
乞俯燭生等之微悃特軫先賢之美蹟明査嚴決俾
無後弊則閤下得子產禁毁之美生等遂宣子封植

之懿千萬無任祈懇之至
狀頭慶州生員李鼎炅柒谷生員李錥安東幼學
庚燦
狀下安東進士李胤慶生員權思浹進士金顯
幼學李宗樑南時會柳德祚權賛度柳震春柳遠
柳履祚金斗運生員權思襄幼學李楨漢金龍弼
南濟龜柳漢祚柳公春權琮柳囿春金揚祖李興祖
生員金養運李敬一幼學柳行春柳光祚金弘喆
廷喆
金坤壽金翼運李楨輔李楨震李光一李崇延
李隆延進士柳璧祚幼學柳鼎祚柳晟祚柳致睦
時彥進士李墽幼學李永發金弼夏金弼熙

李00006幼學李永進李00007李堧金弼成金弼秉生員
李永遠幼學李永籙金弼亮李永聞李應秀南漢秀
張光夏權範海權䂓李師默南時學李秀聃柳亮祚
柳衡祚柳恊祚柳明祚柳政春李永鉉李永奎李埞
李埰金弼欽金進洙金00008金壔柳持睦李秀最李永
柳秉祚柳鱗祚柳雲祚權信度權寬度南荆龜
始春
李龜蓮李師觀金龍景柳溥金龍吉鄭象熈
宗藎
李得箕申應喆金泰霖金述言金炳運南時明
南始會朴井冽南信龜柳蓍文呉尙澈李養訥李養
李漢明李貞斗鄭址柳思睦呉尙潝柳舜華柳埻

金呂燮金世敏金道宗李敏相李潤白金世奎金世
李龜老柳洙柳性則宋思遠李震復柳長春柳復
金壽靖金復奇李學祖李養敬李龜天柳宗睦
燮龜
李楨奎李漢膺李遠裕柳暹祚金世緯安爾宇
金壽星柳斗春金奎洛權00009金乃元權玶李冝淳
英祚
柳00010柳崇睦柳00011柳馨祚柳弼祚柳植祚柳源
柳學祚柳定春李唯一李根一金鎭福金南運
柳學祚柳定春李唯一李根一金鎭福金南運
晋壽
金滎壽金會壽金鱗教李之綱金正運金紹運
金泰運金可運金肇運金象壽金始幹金始陽金始
金若運金克壽金鎭厚金亨鎭金鎭德金元鎭

憲運金喬壽金鎭坤金鎭綱李墵李永休李秀寅
權鼎權尙䂓朴宗鉉進士金熈卨金熈召幼學
明運
生員李寅龍幼學李東樑李宗衍生員金宗鐸
姜榲幼學李汝幹李汝龜河錫九河錫八柳洛休
宅文
權範洛柳錫文柳鍾文河錫東進士柳晦文
柳友文權漢度權用中金永運權宅中李宇謙
禎運
金鍾連南龜燦朴之翰金利運權就仁權尙七
權馨宇生員金熈民幼學金熈奮金熈綗金在華
在衡
金在寬南煜柳起文柳魯文柳暐文柳淵文
雲休
柳相文柳再文柳進文李冝秀李泰慶李之慶

進士李宗周李宗儒幼學李晩慶李彙慶李植慶
李宗休李宗荗李周祥李宗樸李榟秀李周範
庭詩
李周祜李周憲李周成李周翰李秉秀李樟
金弼詩黃潤基李義綱李敬綱李學綱金世瑜
厚根
李師默權鈺權00012權錪權鍊權鐸鄭仁復鄭觀
鄭仁木琴學洙權震仁孫尙直金周燮金龍玉
汝述
金邦喆金民喆金龍普金鎭奎金世訥金世潤
金龍胤金世教金始敬金始鍊金會運金始礭金躋
金台壽金鐸運金漸運金星壽金庚壽金師運
頣運
金精運金得運金文壽金聃壽金始琢金亨壽

金始學裴顯溥裴顯朝裴命周裴翰周裴翼周裴錫
柳致默柳述文柳致晦柳世文朴之晦朴之楨
之喆
朴宗喆李顯迪李顯猷李顯道李相瓚李顯仁
李相洛李宇愽李海周李海朝李宇恒李宇斗李海
李宇肅李海昇李海老禹疇鐸禹龜瓚禹龜恊
周榦
李宗齡李定秀李允秀李性秀李直秀李應秀
李庭芝李庭植李庭實柳德祚金虎運生員權晦
鄭來天鄭來望鄭之彥進士李寅龍幼學金養正
朴之翰柳養洵南龜㸇柳養一李宇謙生員權禕
金進凋李永震李養中李養浩李養謙李潤根

潤春李汝稷李承祖李繼祖李敬簡李貞簡金貞
顯柱
金洪柱金昌柱權休復權駿復權昌復李汝虎
金始復李汝復李相喆李之簡柳碩祚禮安進士
秉淳
李龜洙李龜默李龜邦李龜文李民淳李保淳
李大淳李好淳李時淳李濟淳李必淳李程淳李基
李朱淳李老淳李師侗李師愚李元模金啇儒
星儒
慶州進士鄭東弼幼學李鼎兼李鼎樸李宅祥
進士李鼎儼幼學李鼎垕李文祥李岳祥孫星渭
相謙
崔琇生員崔南復李鼎基幼學崔00013鄭來永
來亨
孫采九任尙繼黃正五生員李觀祥幼學孫綸

崔穆崔00014鄭禮一鄭道一李憲教李鼎集李健
崔淥崔桐夏義城進士李祥發幼學李基發李玄發
生員金誠應幼學金宗訥金宗穆金淵進金樂進
申冕朝幼學柳敏春柳樂春申木仁進士申鼎虎
權得仁幼學金原進權中倫權中績金堂進金庭進
金經進金山進金三進金章進生員金淸進幼學
菘祚
金觀進金養倫金養淳申世仁金英鏶申鼎年
生員申鳳朝幼學林元碩金宗祿金宗仁金千進
川進
金養休申憲朝生員金宗臣幼學金基進金耕進金敬
生員金宗軾幼學金養駿金思進金師進

金陽進金翼進生員金宗駿幼學金恒進金百進
養穆
金養駉生員李家發幼學李昌發李志發金養
金喆進金誠進李奎發金濟裕金鼎裕金養觀
浩發
李明發申鼎重申鼎五申鼎凝申鼎時申鼎吉
金養純金養年滎川幼學金相楫進士金相溫居昌
幼學尹東野尹檍鄭光顯李東泰李尙朝尹榘善山
幼學李鼎暹李鼎晃李鼎景金爾柱李永稷宋應敬
李永穟李永穫李永華進士金完燦李塧李載延
幼學金永稷金昊運朴世奎吉元慶朴世瑛金希鳳
範錫
權處揆金潤疇朴世賢金利鉉金希說金虎燦

金豹燦崔鵬羽崔師夏崔崑植金應柱李㙽盧尙檀
朴昌秀朴世龜朴世虎金亮昊金希鐸朴世休朴來
朴來儀金利運金利用金世鍊金晦燦高靈幼學
金混金敬祉郭煃金正宇生員呉慶觀幼學金正容
郭漢翼呉慶鼎朴文國李悅郭漢綏呉慶人呉在龜
金敬喆郭鎭奎郭厚寧郭宇寧金敬成金相度金泳
李大奎郭欽寧郭堥朴泰國郭之翰呉應瑞生員
郭溟翰幼學金顯精李天鵬郭民寧生員呉應雲
郭孝永金鍊郭宗傅呉應瑀金亨剛金喆剛金碩
朴慶霖李馹臣李00015李㥳朴善謙金鉉金鑮金鍟

李慣金相益金相鉉呉瑞龜昌寧幼學安岳重安孝
進士成孝兢幼學李光岳李衡岳李浩直成啓臣
成孝永進士成孝天幼學成激淸道進士朴潤德
朴孝仁李仁植李衡天朴洙德朴尊孝朴師德
淵德
金致吾朴之文朴孝永李夏楨李復春朴增耆
朴敏德李之牧朴鈺朴廷夏元在俊密陽幼學李秉
李秉勲李章燮李鼎燮李良燮蔣裕周李輝琢
輝相
李輝發蔣台周蔣師周朴鼎實朴鼎凝朴鼎彜
朴鼎洛孫思默孫以魯進士孫有魯孫秉魯幼學
拭魯
朴鼎胤朴世德朴鼎裕朴世孝曺緯文曺復文

曺起文曺應文曺希振曺希鐸孫義東孫俊東孫奎
孫承九孫承大孫承慶孫弼龍孫吉龍孫宅永
敬民
孫錫遠李輝鐸安瑛重安珹重安簠重申嶷
申悰安孝寅安孝述安孝誾李曾臣李仁堅蔣來
慈仁幼學崔宲崔周翰李邦烈朴宗漢崔彥燦
寅德
崔慶漢朴欞崔復海崔南七崔時燦崔00016尙州
幼學蔡學東李命延李種延鄭宰魯鄭成魯鄭滎魯
趙述祖進士趙鼎和幼學趙遇和姜必觀姜世霖
世隣
姜典欽姜載欽姜鼎欽姜卨欽姜詩欽姜鳳永
柳抃春柳寔春柳晋春柳軾祚柳升祚姜必祿姜世

姜鳳欽姜肱欽鄭陽魯鄭象晋鄭象漸鄭象履
象豐
鄭象鉉鄭象健鄭象升鄭象觀鄭象璜鄭民翰
趙述謙仁同幼學張尹燮張命燮張汲金煦南泰道
張基德張光載張以健張東淵張以禮金履權張師
張鎭祿張必重張東聚張守奎張一燮金星權
張00017張華燮張晋龍張晋鳳張漢柱張夔燮張益
趙始儉張世翰金衛漢申萬應張守義張龍燮
寅燮
金潤崗張濠金相權權愼度張道燮張天燮
謹度
張洵權晋度柳昇春張始光張國樞張涑張民
張漢樞進士張壽山幼學權尙度張壽鼎張瑬

壽斗張勛燮張重睦張憲石申宅明申宅寧申周㦿
申宅周申宅豐柒谷幼學李東汲李東泌宋日秉
學濬
生員鄭灝幼學宋日躋李鋉李養運鄭瀅李東
李尙德李東維李東賛李宜祿李東大李東馦
鄭旭東李鏐李鍵李鏞成獻魯成周魯李東卨
宗運
李以豐李以俊李鏵李圭祿李鋧李銖李秉周
洪升雨李秉魯李秉天鄭光林鄭光彬李得培鄭混
李東亨李東吉生員李錥李昌運金萬玉尹載性
震運
李東恒李鏶鄭涑李鋋宋心傳鄭光櫓鄭光榦
宋履璜李養運星州幼學洪錫圭鄭奎錫裴萬達

鄭壧金疇範金益耉金俊鵬鄭默鄭潤宅崔柱昇
崔柱昱朴洙燁鄭東九進士鄭煥鄭東琇崔柱極
柱河
李元睦李亨睦李寬睦愼基善愼基益李禧潤
李庭直李海運李周運永川幼學鄭夏勛進士鄭夏
幼學鄭夏浚李國林鄭夏00019鄭一鐫鄭夏溭鄭夏
鄭夏源徐尙絅鄭夏赫朴希甫權頥鼎李東馥
鄭濩幼學鄭夏夔鄭夏倫鄭宅休鄭宗休鄭文休
鄭夏胤鄭弼衡李東謙李廷模李廷楷鄭夢
祿
鄭夢奎鄭夢錫鄭東燮鄭夢恊李元模鄭奎曺慶弼曺鼎
曺象九曺顯九曺鵬九草溪幼學盧00020朴基慶

東璧全弘曄盧國楨安洞柳得仁全弘極安洽李德
盧國泰全宅東李胄華盧濬三嘉幼學南以一
慶龍
宋錫相李璣峻愼宇洪許瞮宋錫禧尹宅心
許儼愼澤龍金象九宋有臣宋有成文善光鄭有
文穆光南起元鄭亨稷鄭東稷金龍九都慶毫
師範
鄭師禹宋錫斗宋啇明文永光尹宅勲尹宅璣
宋伯孝許橃鄭達僑李心哲李永哲李馨峻鄭師極
李滎峻林柱義權正璣林璞林柱奭文佖光文尙九
李寅哲尹宅範尹宅鼎文烈光宋有麟金攸九金鎭
金勲鄭貫稷鄭光稷河陽幼學金涑金浹金器重

金器文李國祥許鈒曺復龍金達遠許演金澲黃道
金尙昊曺顯龍黃道覺慶山幼學權璲蔡師敬
光天
鄭萬權李浩中蔣仁復李樑東魚思直朴思烈
金宇弼郭柱漢鄭惟藩鄭錫洪李璟朴重采韓壽仁
鄭有悌宜寧幼學李昌祿李德祿李膺祿李擎臣
益模
李基祚姜碩德姜00021姜00022陜川幼學文周兌
允精
金喆精河應一文演愽朴世林文正斗曺啓喆
文周鳳姜東喆文正儒河緯成文義愽龍宮生員
天燮
幼學尹汝瓚李章羽尹汝璜丹城生員權鼎九
進士朴文聲朴民翰靈山幼學裴以雄裴以坤裴以

醴泉幼學朴漢明朴紹寧朴泰寧晋州進士河鎭
金濟運英陽幼學趙彥儒趙星復

題日粤在先朝頒下鄕禮合編以牖衰俗每念此
事未甞不感涕無從今見狀辭乃古昔先賢講明鄕
約事也令人敬嘆之不已念先賢則當導舊約念其
義則當護其家而今其肖孫也乃爲孽孫所侵迫作
挐至於破約逐籍之境苟有鄕俗之善者豈任其如
是苟知營邑之可畏亦豈有此事以此事至有道內
諸儒之不憚來訴於營庭公議大可見同崔興濬
爲先發差捉來嚴加査實後如法懲治次刑止報來

宜當事本官

道儒再度狀【
丙寅六月】

伏以天下之惡不一而莫大於害賢故人可得以共討
法不可得以容貸此天叙民彜之所由關草尙風偃之所
由係也近世本府北八公山下有所謂夫仁洞洞約即
徵士百弗庵崔先生之建設而嘉謨懿範流芬剩馥實
爲一方之善俗百年之美規矣乃者先生之孽族有名
者作華多端搆誣罔極必使洞約毁破而後已誠所
謂惡之大者也一道章甫同聲共起以討其罪而興濬
並與道儒而誣之凡爲地主者豈無尊賢尙道之誠而

惟彼興濬百般舞弄眩惑官聽竟使誣說得行公議
莫伸先賢之受誣不惟未雪又益其汚衊士林憤耻
到此極矣仁人君子任世道之責操風化之權其忍恝
然而不思所以敦民心樹風聲之策乎生等玆敢復
申前請仰陳大槩伏惟閤下之試垂察焉粤在先
朝先生以學問行誼優被恩渥生而登桂坊之選
歿而降銀臺之贈而綸綍之寵眷旣隆棹楔之
旋褒亦滎是乃昭代之醇儒後學之宗師也雖其懷
道抱義賁趾丘園平日所蘊未能展布而觀於夫仁
洞洞約亦可以驗山林之一部經濟若是其不草草

矣何者先生之先祖臺巖先生孝廟師傳崇禎處士也
方當幸瀋在家膺命追到龍灣行塵已
遠痛未遂負勤之誠思欲追蹈海之志遂入此洞名
亭曰聾淵名溪曰瞽潭終身不出世焉先生爲其先
躅之在是也杖屨來徃讀書其間而見其洞氓淳厖
可與有爲遂爲之結社立籍於是乎夫仁洞洞約成
矣夫是約也推張子畫井之議倣朱子社倉之規置
先公庫以應公家之征賦置恤貧庫以助無田之資
活此蓋寓夫豳風忠愛周官任恤之餘意而又取呂
氏鄕約而增損之乃立春秋講會之堂士齒于堂民

列于庭相與勉之以孝友睦婣之道勸之以農桑勤
苦之業是故居是洞者終歲不見吏終身不憂食安
生樂業教行俗成至有男女異路頒白不負戴之美
公山一區宛然有三代遺風矣當是時爲邑侯方伯
諸公無不稱賞而賛助有如趙侯載淵尹侯啓東
侯景興
李相國成中趙相國雲逵或宣力於資給或
用意於蠲賦以至於今領相李公之按節也特捐捧
餘五十餘苞以屬於洞文以序之此洞美蹟此猶可
據况先大王十行褒綸昭著耳目輝暎古今猗歟
休哉可作百世不刊之典者奚但如金石之或有時
而毁泐者哉自是以來前後營府之軆念顧護靡不
用極而先生易簀之後其孫崔湜一遵其舊無或失
墜可謂無忝之兒克肖之孫也噫彼興濬者素以怪
鬼居在本洞其於洞物多有負犯及其情節旣露形
跡莫掩則乃敢齮齕之搆捏之甚至於誣呈官庭割取
公田撞破洞櫃偸出文案末乃唱和同惡陰嗾無賴
逼斥先生所立之籍不立於本洞又復慫惥面任遊辭
瞞報分割聾淵所在之地以屬於他里噫儒賢之謦
咳隔晨先王之教誥如昨而乃反爲公麽一小孽之
所壞了則凡有人心血氣者孰不長吁永嘆深惡而

痛絕之哉奈何新舊本官之處決終始逗遛不辨曲
崔湜之累次呈訴不得一番兩造門狀鄕狀之次
茅繼出而乃亦掩置延曳無所可否者抑又何意
之肆氣愈毒期欲毁規者良有所靠而然也生等
於此不勝齊憤徃年十月初三日齊會於本府之
經書院
因以呈營冀其伸卞營題有曰粤在先朝
頒下鄕禮合編以牖衰俗每念此事未甞不感涕無
從今見狀辭乃是古昔先賢講明鄕約事也令人敬
嘆之不已念先賢則當遵舊約念其義則當護其家
而今其肖孫乃爲孽族所驅迫作挐至於破約逐籍

之境苟有鄕俗之善者豈任其如是苟知營府
之可畏亦豈有此事以此事至有道內諸儒之不憚來訴
於營庭公議大可見矣爲先崔興濬者發差捉來嚴
加査問後如法懲治次形來報來云云時則本官發
行上京已數日矣未即到付遠地道儒勢難留滯各
自罷歸矣及其還官興濬先呈誣狀以爲崔湜乘空
官嗾出姻婭私屬名以道會擅殺二牛其他搆誣又
無紀極本官偏信興濬之說捉致崔湜之奴酷施刑
杖剋懲罰鍰而其報營則曰私作一稧是胡大事暗
嗾姻婭稱以道狀虛張名數恐動聽聞噫道會呈狀

者幾至七百餘人則皆是崔湜之姻婭私屬乎之人
也皆能知喫飯歠羹其亦一聽人嗾顚倒奔走有如
呼牛而午應呼馬而馬應乎大抵此事之橫決至此
都由於興濬一人慢䙝聖教興濬
事也侮蔑先賢興濬事也打破美蹟興濬事也誣捏道儒興濬事也此而不
治則世道人心將不知至於何境生等非不知更籲伸卞
而所謂伸卞適足爲本家取禍之道故忍憤退縮三
年于玆矣何幸相國閤下分憂北闕觀風南國按
澄淸之轡駐襜帷之節風稜所曁貪汚解綬仁聲所
播良善彈冠環嶠嶺七十州凡所以伸枉雪誣癉惡

別慝之政庶幾拭目而可俟今日生等之不避盛暑
來籲於棠陰者盖以此也昔朱夫子婺源舊基見奪
於勢家考亭遺墟被占於豪右而乃能推還於五世
之後福建士大夫之風聲力有如是矣今乃以此竊
有望於閤下伏願閤下念漢史尊五美之義體周家
屛四裔之制特賜明察快施嚴決使先賢之美蹟得
完奸徒之惡習知戢以慰一道多士之望無任祈懇之至
狀首安東幼學金鍾運義城幼學李政發善山幼學
李鼎暹
狀下上同

題曰崔公行誼洞約事實曾所稔聞而想慕者及按
是府伊人已不可見而其遺風餘䂓未知尙有存者否
以是常徃來於心今見狀辭不覺蹶然疾讀繼而浩
歎也以崔公勸俗之勤洞人熏化之深身沒甫數十
年而其廢壞毁畫已如此儘乎末俗之難平美事之
易毁也道內章甫之齊起呈籲公議可見而前使題辭
又如是鄭重則懲治矯正之道未知因何尙稽而弟
見狀末所陳多有語侵本官處事關於尙賢紏俗爲
官長者豈或歇后今當發關本府捉致其作梗者各
別査實果與狀辭無爽則照法嚴勘在所不已至於
修明舊規毋墜先輩美意則在於其家後人以此勉

旃宜當事

崔興濬定配時勘決文案

觀察使兼巡察使爲謄給事大丘判官牒呈內本府
解北村夫仁洞崔興潤文時太等議送內矣等以本洞
洞稧事前已呈訴而未蒙題下是如呈議送題音內
此事即一未了之案向來道儒呈狀中措語有不審
故有所論題而至於崔興濬之罪亦不宜仍置而勿
論觀此連呈議送尤可見其無嚴元狀之留置盖欲
一番處分興濬身即爲捉致且招本洞民査問委折
以報向事題音是置有亦上項崔興濬即爲捉致且

招該洞解事頭頭人這間委折詳細査問則洞民
尙宅
朴聖得等所告內崔翊賛進賜設置洞稧有曰
先公庫即洞民貢賦當納之庫也有曰䘏貧庫即貧
民賙賑之庫也其良規美制著聞京鄕是如乎翊賛
進賜卒逝後其孫崔湜繼爲稧長年前洞約碑閣爲
大水所圮改建物財別備取長及其收捧營役也用錢
各人擧皆當限備納而獨崔興濬所用錢物屢督不
報故稧長依稧憲約條興濬奴子畧加笞罰則興濬
以爲吾與稧長雖有嫡庶之分何可代打奴子是如
因此含憤乃言吾祖亦是設稧時同力之人吾之三

兄弟自退稧案是如爲遺稧畓十五斗落勤執耕食
終不半分其所作梗不有餘地故有道儒呈議送之
擧是乎所崔興濬所用稧錢九十二兩租八十八石興濬
四寸興岐犯用租爲二十二石賣食畓爲二斗落幷令推
給亦爲有旀崔興濬所告內矣身與崔湜爲十二寸
祖孫間而崔翊賛與矣祖同力設稧崔翊賛卒逝後
有稧錢所用者而貧不能趂期辦納則崔湜不有族
誼代打奴子故不勝憤慨有自落稧案之心而稧畓
十五斗落以矣身三兄弟條執持耕食不爲半分者
合而計之租果爲八十八石錢果爲九十二兩是如乎

崔湜以此發憤呈府呈營至有道狀之擧矣身反以
思之洞稧自有所重始覺前日之妄擧屢次謝過於
已爲和好而同錢租與畓庫今方還納於稧中計
料是如爲臥乎所此訟顚末判官赴任之行因崔湜
之中路呈狀已知其槩是在果今以各人所告觀之
上項崔興濬取用稧錢延拕不報是如可因其笞奴
故起閙端沮毁稧憲所用稧物仍爲乾沒之計者灼
然可知究其所爲殊甚可痛兺除良以崔湜狀辭見之
崔興濬含憾起釁語侵先世撞破櫃蔵搜出稧券云
爾則其以孽凌嫡沮破洞約之罪在所難逭而今於

査問之日乃以自知其罪屢次謝過已至和好而同
畓與錢穀鱗次備納於稧中之意納供是乎等以緣
由牒報爲臥乎事題內崔興濬之以孽凌嫡可謂風
化所關至於語侵先世撞破櫃藏搜出稧券之事萬
萬駭悖到今雖以謝過和好等說爲發明之資而昨
年六月渠所呈於營門之狀都是搆誣之語則謝過
者固如是乎此等頑悖之漢不可尋常處之興濬
爲先嚴刑一次取招牒報以爲照律嚴處之地爲旀同
稧畓與錢穀一一還推以給宜當事

大邱判官牒呈內本府解北村夫仁洞居民崔興潤

文時太鄭石中等聯名呈議送內矣等祖與父出物
作稧次次補長轉至四五十年後咸曰解東村崔翊賛
進賜異行卓蹟實爲一方之標準邀爲稧長則稧憲可
以振刷洞俗亦可淳厖是如衆口一談請爲稧長而其規
模凡節自多欽仰矣崔翊賛卒逝後其孫崔湜襲爲
稧長而習俗漸至渝薄稧樣亦多乖當兺除良恣行
蔑法之杖且有非理之漸稧畓文券所藏之櫃盡爲奪
去稧錢八十兩及正租二十二石前已私用稧畓二十九斗
落內十五斗落則自爲賣用十四斗落叚空費於四五年
呈狀時云爾則補稧遵蹟之意果安在哉苟如是則如

干稧物必將盡消於一人之私槖豈不痛恨哉同所失
錢穀與文記所藏之櫃一幷推給事呈議送使題音內觀
此狀辭可知其出於崔興濬之搆誣招致該洞民一一詳
査以報向事是置有亦該洞民人處狀內辭緣逐條査
問則洞民呉尙宅朴聖得等所告內以爲今此狀辭節節
孟浪狀頭崔興潤崔興濬之變幼其名者也狀中聯
名者皆是本洞之民而當初此狀入呈之時無一人參涉
興濬之自爲狀頭偸名列錄有若洞民之狀者萬
萬狡惡兺除良以狀辭觀之無非搆誣在昔設稧時
翊賛
進賜爲稧長斤賣流來洞畓五斗落捧價數十兩
錢而殖利取長以成洞約之事蹟載在碑銘則興濬
謂父與祖出物作稧云者自歸虛妄是遺崔湜繼爲
稧長一遵條約不墜遺蹟則其蔑法行杖自行非理
之說已是白地搆捏者也文券所藏之櫃段興濬故起
閙端撞破洞櫃搜奪稧券故洞民慮或失蹟收拾櫃
藏傳致於稧長崔湜之家則今反謂崔湜勒奪櫃
藏云者尤極巧惡是遺稧錢八十兩崔湜元無私用
之事租二十二石畓二斗落乃是興濬四寸興岐之取
用與賣食者而隱然歸之於崔湜之私用者誠甚叵
測是旀以稧畓事言之碑閣改建時所用取殖之物
興濬輩頑拒不納故稧畓七斗落不得已放買先
用出於稧中公議也且因興濬之作俑起訟許多洞
民四五年徃來官府所食烟債無他拮据稧畓中六
斗落發賣以報之事興濬渠亦明知而乃曰稧畓二
十九斗落崔湜自賣乾沒云者尤是無狀之言是如
一辭納招故以此推問于崔興濬則所告內此狀之
製之書之矣身果皆自爲而當初與洞民相議入呈
是加尼到今洞民皆曰不知專諉於矣身實無發明之
路錢八十兩段矣身誤認以崔湜之私用稧物矣追後
問知則還爲報償於稧中是如是乎旀租二十二石畓
二斗落果是矣身四寸興岐之所犯用而狀中誤書
崔湜之所用是遣稧畓放賣事果如洞人之所告
是白如乎矣身之罪矣身自知實爲萬死無惜是如
自服以告爲臥乎所大抵崔興濬罪狀前已牒報爲
有在果變幻其名自爲狀頭偸錄洞民之名搆捏闖
呈之罪以渠奸譎不敢發明但曰萬死無惜是如爲
乎旀則見崔湜崔溭等呈訴及自活則當初興濬
梗惹閙之時洞民裴迪才張啓成等爲興濬之應兵
有搆罪十條割洞逐籍等擧措而裴迪才則爲本洞
之狀頭張啓成則爲一面之狀頭呈官詆毁沮破洞約

是如故捉致兩漢査問委折則皆曰洞訴面狀俱是
興濬之所爲而矣等則全然不知是如爲乎旀推尋
元狀則亦曰不知其有無而終不現納是乎所盖此訟起
於族親而連於四載初以乾沒稧財之計轉成沮破
洞約之謀搆誣呈官無所不至論其罪首一則興濬
二則興濬而至若裴迪載張啓成等段以無識鄕民
被彼慫惥固不足深究而其參涉和應搆捏士夫之
罪在所當懲是乎等以緣由牒報爲去乎參啇處分
事題內崔興濬本罪外變名呈狀恣意搆誣尤可
痛惋如此悖類不可不各別嚴處以勵風化照律次

加刑捧遲晩報來爲旀裴迪載張啓成等段置受興 濬指嗾搆呈士夫者萬萬痛惡亦不可以枝葉而不
治並嚴刑一次招取牒報冝當向事

大丘判官牒呈內本府解北村夫仁洞崔興潤文時
等議送內辭緣査實牒報使回送內乙用良推考
丁卯二月十一日罪人崔興潤年四十七號牌現納白等汝矣身罪狀査實牒報使回送內崔興濬本罪外變
名呈狀恣意搆誣尤可痛惋如此悖類不可不各別嚴
處以勵風化照律次加刑捧遲晩報來向事回送是置
有亦夫仁洞洞約之美法良䂓其來已久有非後人所
可沮毁者而以洞民所告觀之崔湜繼爲稧長遵守約
條少無損失而汝矣身計出稧錢之乾沒因一笞奴之微事
不有族親之誼嫡庶之分含憤惹閙語侵先世撞破
洞櫃搜奪稧券指嗾裴迪才張啓成等無識之類謂
之洞狀面訴而搆呈詆毁甚至割洞逐籍而期欲破
稧者已極巧惡而以昨年六月呈議送觀之汝矣身
變幻名字自爲狀頭偸錄洞名而狀中辭意之無非
虗罔已盡綻露則今以謝過和好等說欲爲發明漫
漶之計者萬萬痛惋問目內辭緣毋敢粧撰遲晩納
招之意依使回送各別嚴刑究問教是臥乎在亦矣
身罪狀前已自服告達是白在果矣身性本愚迷不
顧族誼與分誼含憾於稧物之督推惹閙於奴子之
代打誘囑洞民分洞逐籍變幻名字搆誣呈狀等罪
狀已露無餘追悔莫及實爲萬死無惜惶恐遲晩納
招是白去乎相考處置教味白齋罪人裴迪才年六
十張啓成年六十號牌現納各各白等汝矣等罪狀
査實牒報使回送內裴迪載張啓成段置受興濬
嗾搆呈士夫者萬萬痛惡亦不可以枝葉而不治幷
嚴刑一次取招報來向事回送是置有亦夫仁洞洞
約有非么麽洞民輩所可沮毁者而敢爲興濬之應
兵至有搆罪士夫割洞逐籍等擧措而或爲本洞之
狀頭或爲一面之狀頭迭出闖呈肆然詆毁者萬萬
痛駭這間委折毋敢粧撰從實直告之意依使回送
各別嚴刑究問教是臥乎在亦裴迪才矣身叚本自
無識洞狀辭意初不知之而崔興濬自製其狀暗錄矣
身之名是白乎矣矣身則元無受嗾和應之事是白乎
旀張啓成叚矣身目不識字又是他洞居生而當初面
狀之書呈與否全然不知而及其事出之後始爲探知
崔興濬與面內居兩班李鎭亨相議製呈是如爲
白置矣身叚元無參涉之事是白去乎相考處置教
味招辭是置有亦上項罪人崔興濬依回送各別嚴
刑捧遲晩裴迪載張啓成等亦爲刑推一次取招牒
報爲臥乎事題崔興濬當爲照律依前題加刑報來
所謂李鎭亨未知何許者而製狀誣人於不干之事
是隱喩其習可痛亦爲捉致査問取招報來面狀亦
使現納冝當向事
大丘判官牒呈內本府囚推罪人崔興濬張啓成等刑
推取招牒報使回送內乙用良推考次丁卯二月十三日
罪人李鎭亨年七十四號牌現納白等夫仁洞洞稧
沮毁事良中張啓成所告內當初面狀之書呈與否全

然不知而及其事出之後始爲探知則崔興濬
鎭亨
相議製呈是如故依其所供報使回送內所謂
鎭亨
未知何許者而製狀誣人於不干之事是隱喩
其習可痛亦爲捉置査問取招報來面狀亦使現納
冝當向事回送是置有亦夫仁洞洞約乃是前人之
美蹟而汝矣身以不干之人因興濬之故起閙端與之
和應搆誣崔湜製給面狀割洞逐籍期欲破稧者果
何意思是隱喩這間曲折毋隱直告所謂面狀亦爲
現納之意推問教是臥乎在亦矣身本無文識僅自
記姓名而已則所謂呈文何以製之乎與興濬相議

製狀云云者誠萬萬虛罔之說矣父生時與崔翊賛
交契深密常常相從之誼一鄕之人無不共知則矣身
年踰七十豈不知世誼之如此而乃有一毫欲害於乃
祖之孫乎是白乎旀且其是非在渠族親間事也洞稧
亦非矣身之所可關涉者則以何心陽與興濬和應相
議搆人誣呈乎興濬文筆足以製狀必不借手於人
而嚴間之下求說不得有此推諉於矣身是白乎喩
張啓成供辭中指告矣身者千萬孟浪是白乎旀矣
身旣不參涉則面狀去處何以知之乎此外無他可
達之事相考處置教味招辭是置有亦土項罪人

鎭亨取招牒報爲乎旀面狀叚推問各人皆曰不知
故方今査實推問計料爲白乎事題苟無所干涉則
張漢豈以其矣製狀空然納招乎所當嚴處而年踰
七十勢難刑訊姑付之於不足責之科飭諭放送所謂
面狀無異匿名之書不必苦推置之爲旀張啓成裴迪
等叚民習可駭加刑一次放送冝當向事
爲定配事大丘府囚推罪人崔興濬矣矣身性本頑悖
以孽凌嫡不遵洞約流來洞畓無端據執取殖錢穀
多數乾沒敢生荷杖之計搆捏稧長誣陷罔測變幻
名字肆然製狀呈府呈營非理起訟是如可罪狀綻

露死無足惜遲晩罪令檢律照律則檢律張之瑜
手本內大典通編聽理條一人於二三處非理立訟者杖
一百流三千里亦爲有臥乎等用良崔興濬叚杖一百
流三千里私罪是乎味手本是置有亦上項罪人
興濬
右律施行杖一百流三千里照律後杖則贖流
三千里定配於道內眞寶縣爲去乎大丘叚到關即時
別定官族使押送配所後交付狀考還爲旀眞寶叚
到配即時可信人處保授安接令是遣到配月日及
保授人役姓名成冊原關幷以上使以爲流案載錄
之地向事
道儒三度狀【丁卯十月日

伏以生等年前以故翊賛崔先生夫仁洞約事齊會
營下有所控籲伏蒙閤下深軫美蹟之將毁洞見奸
孽之作乖首惡之類至被刑配生等於此孰不欽誦而
感歎哉本事之始終委折奸孽之前後罪惡已經俯
燭亦旣勘處有不必覼縷歷陳而苐其罪魁雖己懲
治本事尙無究結生等請陳之葢洞約施設其義甚
微先公則述先王井地之法恤貧則得周官任䘏之意
合洞均糴之制隱然有金華長灘社倉之遺風而其
䂓模法制實倣呂氏鄕約肆我先大王十行絲綸
累蒙華袞而曾未幾何變恠百出姓諱所載之籍恣
意移屬杖屨捿息之里輒自分割遂使百年美制不
免一朝蕩然生等竊痛焉噫先輩百年行之而無弊
而一朝爲奸細輩所破壞無餘生等非敢以爲承守之
得盡其道而苐以變起門族事關財利本家之人本不
欲極意爭訟而况今嗣孫飮恨慘逝遺孤㷀然在疚遺
制未復主管無人今日之收拾殘餘以圖申復豈非生等
之責乎仍念閤下好古愛禮逈出尋常方設鄕飮之儀
以示樂賢之誠又依秀選之規以寓賓興之義此皆三代
之制而閤下乃擧而行之生等聞風觀禮適會此鄕遇
事興愴輿情一倍玆敢相率申籲恭俟裁處葢籍移
則本家將永絕於本洞矣洞分則洞約亦難遵乎舊
規矣主家無主檢之意而洞約無收復之期則昔賢之
申勤施設不但終歸泯沒而閤下之克念美蹟亦將
無復實效矣伏願終始垂惠成出完文行關本府題給
決案立籍合洞一依舊規而前後査庭供招及所屬文
券一一推給以爲日後憑信永久遵行之地千萬祈懇
之至
狀頭慶州幼學李岳祥居昌幼學尹東野義城
幼學申鼎周狀下柒谷幼學李東汲李羲運權景美

周魯李陽運慶州進士鄭東弼李鼎益幼學孫綸九
安東幼學李禎輔李致馨金漸運尙州幼學鄭秉魯
鄭象晋鄭象觀黃巖老趙抃然進士黃磻老南漢模
幼學南漢醇姜長欽義城幼學李志發金英鐸善山
進士李載延幼學金希說金鼎壽軍威幼學洪文虎
李錫龜大丘幼學孫養九郭柱基趙錫獜朴履周
廷圭
蔡必勲密陽幼學孫承大安孝觀孫承泰高靈
幼學郭厚寧朴慶起進士郭溟翰蔚山幼學尹秉恒
永川幼學曺鶴九淸道幼學李五禎李秀榦河陽
金履德金器仁曺慶憲金器正靑松幼學趙漢奎

進士閔宗赫興海幼學李宅觀眞寶幼學李海星
致赫
權奎盈德幼學申大重慶山幼學金宇弼徐杙
鄭昌鎬

題曰此事顚末已爲詳知本家不幸零替將無以嗣
守遺規誠可傷歎其可使徃賢美蹟永無可尋於此
洞之中乎還籍合社二事玆以發關分付於本府使
之擧行亦爲成給完文與決案俾作後考向事

營關

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即接道內儒生尹東野
等聯名呈狀則以爲矣等以大丘府翊賛崔公

約事前有所齊籲奸孽作梗之類至被刑配而但本事
尙無究結盖洞約設施其義甚微先公則述先王
地之法
恤貧則得周官任䘏之意合洞均糴之制隱然
有金華長灘社倉之遺風其規模法制實倣呂氏鄕
約至蒙先朝嘉獎之綸綍而見今本家衰微變恠
百出姓諱所載之籍忽被移屬杖屨捿息之里輒自
分割遂使百年美制不免一朝蕩然故道內儒生輩將
欲修復舊制苟或籍移則本家將永絕於本洞洞分
則洞約亦難遵其舊規矣立籍合洞一依舊規之意
分付本邑亦爲有置葢此崔公之洞約實是罕有之
美蹟而本家不幸零替奸孽又爲惹戱本家之移籍
而遺跡無可尋之所本里之分洞而舊約無可行之地
自此賢人之設施規模永就湮沒此豈非慨然處乎士
林聯籲反復勤懇可見公議之攸在庶期美蹟之不
泯乙仍于今方成給完文玆又發關爲去乎崔翊賛
本家一戶依前還籍於本里而本里分洞一事即令
勿施亦爲依前合洞之意知委該面施行爲旀擧行
形止報來冝當事
本府報狀【丁卯十二月二十八日

爲牒報事即到付使關內乙用良崔翊賛本家一戶
依前還籍於夫仁洞本洞亦爲依前合洞之意傳令
該面爲乎旀刑止牒報爲臥乎事
營門決立案【戊辰正月初九日

右爲決立案成給事則接道內儒生尹東野等聯名
呈狀則以爲矣等以大丘府翊賛崔公洞約事前
有所齊籲奸孽作梗之類至被刑配而但本事尙未究
結葢洞約設始其義甚美先公則述先王井地之法
貧則得周官任䘏之意合洞均糴之制隱然有金華
長灘之遺風其規模法制實倣呂氏鄕約至蒙
先朝嘉奬之綸綍而見今本家衰微變恠百出姓
諱所載之籍忽被移屬杖屨捿息之里輙自分割遂
使百年美制不免一朝蕩然故道內儒生輩將欲修
復舊制苟或籍移則本家將永絕於本洞洞分則洞
約亦難遵其舊規矣立籍合洞一依舊規之意分付
本邑亦爲有置葢此崔公之洞約實是罕有之美蹟
而本家不幸零替奸孽又爲惹戱本家之移籍而遺
蹟無可尋之所本里之分洞而洞約無可行之地自此
賢人之設施規模永就湮沒此豈非慨然處乎士林
聯籲反復勤懇可見公議之攸在美蹟之不泯乙仍
崔翊賛本家一戶依前還籍於本里而本洞分洞

一事即令勿施亦爲依前合洞之意關飭本府玆又
完文成給爲旀崔興濬照勘之前後文案亦爲謄給
以爲決立案之地者

營門完文【
戊辰正月】

右文爲完護事本邑夫仁洞即故翊賛百弗庵崔公
捿息之所而洞約設施其義甚盛至蒙先朝嘉獎
之綸綍而不幸本家近甚零替奸孽從而作梗將至
於莫可收拾之境若使本家之籍移於他處夫仁之
分而二之則廷賢遺跡永無可尋於此洞乙仍于玆
以關飭本府更爲完文成給爲去乎本家立籍夫仁

合洞兩件事一依舊規勿替永遵冝當事

本府決立案【
戊辰正月】

右爲決立案成給事即接道內儒生尹東野等聯名
呈議送內以爲矣等以大丘府故翊賛崔公洞約事前
有所齊籲奸孽作梗之類至被刑配而但本事尙未
究結盖洞約設施其義甚美先公則述先王井地之
䘏貧則得周官任䘏之意合洞均糴之制隱然有
金華長灘社倉之遺風其規模法制實倣呂氏鄕約
至蒙先朝嘉奬之綸綍而見今本家衰微變恠百
出姓諱所載之籍忽被移屬杖屨棲息之里輒自分
割遂使百年美制不免一朝蕩然故道內儒生輩將
欲修復舊制苟或籍移則本家將永絕於本洞洞分
則洞約亦難遵其舊䂓矣立籍合洞一依舊規之意
分付本邑亦爲有置葢此崔公之洞約實是罕有之
美蹟而本家不幸零替奸孽又爲惹戱本家之移籍
而遺跡無可尋之所本里之分洞而洞約無可行之地
自此賢人之設施規模永就湮沒此豈非慨然處乎
士林聯籲反復勤懇可見公議之攸在美蹟之不泯
乙仍于崔翊賛本家一戶依前還籍於本里而本里
分洞一事即令勿施亦爲依前合洞之意因營關措辭

完文成給爲旀崔興濬照勘之前後文案亦爲出給
以爲決立案之地者

本府完文【
戊辰正月】

右文爲完護事本邑夫仁洞即故翊贊百弗庵崔公
捿息之所而洞約設施其義甚美至蒙先朝嘉獎
之綸綍而不幸本家近甚零替奸孽從而作梗將
至於莫可收拾之境若使本家之籍移於他處夫仁之
分而二之則廷賢遺跡永無可尋於此洞乙仍于
更爲完文成給爲去乎本家立籍夫仁合洞兩件事
一依舊規與今下營關勿替永遵宜當事
門狀【庚寅正月崔興濬與其子鳳成更起閙
端投單門中侵辱先賢故遂有門狀鄕狀

伏以惡莫大於害賢罪莫重於犯分故曾傳有迸裔
之典魯論有正名之訓此民彜之所由關而王法之所
不貸也民等世居此土宗族寔繁而仰軆先師垂範
之訓夙請族親敦睦之義苟有過失則必爲之相規
相勉欲使之潜消暗融惟恐師訓之或墜而至於孽
崔興濬則負犯不小置之難化之域者殆將三十
星霜而今又惹起罔測之變自抵難貸之惡則爲此疾
聲齊籲欲正其害賢犯分之罪者葢亦民等之所不得
已也伏願城主試垂聽焉民等先師故翊賛百弗菴崔

先生乃先朝之徵士後學之宗師雖其賁趾林泉未
能展布素蘊而惟其一二經濟之畧綽施設者即
仁洞
洞約是已先師甞愛是洞之民俗淳朴與之結
社修約而春秋會講相勤相規則呂氏鄕約之法也
置田制產先富後教則張子畫井之制也若夫先公有
庫恤貧有倉使征賦無所欠凶荒有所救則朱子
之餘意也一洞之人無不心悅誠服教行俗成至有
男女異路頒白不負戴之美而宛然有三代遺風夫
如是故粤我先大王特除桂坊之選而寵遇之遂
命道臣謄上洞約一抶又於筵中教曰如此之人必欲
見之申飭上來夫以此公山之最深僻處而上徹於
九重之淸燕則有非么麽輩之所敢作乖而惟彼
興濬素以沴毒之性敢生圖破之計恣意跳踉百端
舞弄割取公田任意斥賣撞破櫃藏偸出文記逼斥
先師所入之籍不立於本洞分割先師杖屨之地以屬於
他里甚至誣辱師門謀禍胃孫故鄕道章甫齊聲共
討累訴營邑削出洞里不敢接迹嚴刑照律至於遠
配然後旣廢之洞約始得牽補旣盡之公物始得收
聚而惟是嗣孫抱恨而先逝則遺孤之痛泣刻骨洞
民之怨恨充肚又烏可以筆舌旣哉此興濬所以被

黜遠移於他邑不敢復厠於洞里吉凶慶吊之不與
同者至今數十餘年矣今冬葬其妻之日與其子
同惡相濟幸本家之孤弱而以本洞之不爲顧助
執爲話柄罔測悖辱肆口播言飛文門中侮弄威喝
字字句句不忍正視噫嘻痛矣古今天下寧有是乎
圖毁睿獎之良規則得罪於邦憲也侮辱儒門之
師宗則得罪於斯文也以渠賤孽號令門中則得罪於
名分也詬辱宗嫡無所顧忌則得罪於先靈也有一
於此固邦法之所不容誅况兼有此四者而妨賢之
惡尤爲其大者乎此盤湖尹相公所謂興濬之稔惡
圮族不可以薄竄懲之者也玆以洞約一冊及前後
文案聯綴呈上伏願城主軆先朝隆遇之眷追道臣
庇護之意同崔興濬鳳成父子捉致法庭依律嚴處
一以遵迸裔之典一以明正名之訓千萬祈懇之至
題曰依律嚴處次發牌事
鄕儒狀【庚寅正月

伏以天下之惡不一而莫大於害賢故人可得以共討
法不得以暇貸此周書所以有別慝之訓而獜經所
以有懲惡之典者也府北八公山下有所謂夫仁洞洞
約即故徵士百弗庵崔先生之所建設而嘉謨懿範
實爲一方之善俗遺風餘韻永作百年之美制乃有
賤孽崔興濬者不幸近出於崔先生之門族而誣逼
恣弄必欲打破而後乃已故道儒之聲討甚正營門
之公決且嚴永黜本洞使不得接迹者已成不可易之
斷案而今乃忽地起閙侵犯誣辱罔有紀極誠所謂
惡之大而法不可貸者也仁人君子任世道之責操刑律
之權者其忍恝然而不思所以爲別慝懲惡之策乎玆
敢不勝公憤仰陳輿情伏惟閤下垂聽焉恭惟我崔
先生乃昭代之醇儒後學之宗師也以明軆達用之學
懷推已及人之志依倣古法設爲洞約規模鋪置則
社倉之法也斟酌古今則張子畫井之意也先公則
述周家之制講信則取藍田之約能使公山一面挽
回醇古之俗而至有男女異路頒白不負戴之美則即
此風聲題目亦足以扶世教而補王化感人心而竪民
彜前後邑侯方伯諸公無不稱賞而賛助或宣力於
資給或用意於蠲賦至於領府事李公
之按節也特
捐俸餘五十包以屬於洞文以識之此洞美蹟此猶
可據况先大王十行褒綸昭著耳目輝暎古今可作
百世不刊之典者奚但如金石之或有時而毁泐者哉
噫彼興濬素以櫃忮之性又懷娟嫉之心恣意跳踉
百般舜弄割取公田任自斥賣撞破櫃藏偸出文案
先師所入之籍逼逐於他面先師杖履之地分屬於
他里甚至誣辱師門謀禍胄孫故鄕議齊憤道論同
聲累訴營邑削出洞外嚴加刑律至於遠配而最是
胄孫抱恨而先逝則遺孤之痛泣刻骨洞民之怨恨
充肚此興濬所以被黜於儒論遠移於他邑不敢復
厠於本洞而吉凶慶吊之不與同者自是從前已決
之案則今於葬其妻之日渠亦非不知洞人之越視而
將欲復入本洞圖破舊約遂以不爲顧助執爲欛柄
罔測凶言肆口公傳侵辱師門無所不至隱然以曩
時手法敢爲甞試起閙之計此不但興濬之不悛舊
惡實其子鳳成有世濟之惡而幸本家之孤弱謂此
機之可乘而然也噫嘻痛矣是可忍也孰不可忍也
於乎興濬冐入則洞約必破矣洞約破則賢跡自泯
矣賢蹟泯則先大王華衮之褒優異之典將何所
影響之可尋乎某水某丘之一經杖屨猶寓羹墻之
慕片言隻字之一被睿覽尙存於乎之思則况此褒典之
所加經綸之所寓民等之必欲奉聖教而守賢蹟其
亦但可已乎曾有興濬之作年於前後有鳳成之濟惡
於今意士論之歲久或息恃父年之老不當刑揚言
破規者鳳成也挺身投書者鳳成也父傳子受復踵前
習則其負犯何等罪惡其關係何等重大豈可以么
麽奸孽之不足與較而不卞先賢之受侮不䘏美蹟
之見墜乎民等俱以百弗先生之鄕井後生或有操几及
門者或有聞風興起者附跡興懷有如隔晨事耳好懿
之良心自激辨惡之嚴典自在則民等之不憚塞威有此
呼籲者盖亦公議之所不可已也伏聞閤下念漢史尊五
美之義軆周官迸四裔之典特賜明察快施嚴斷使先
賢之美蹟得完奸徒之惡習知戢千萬不勝祈懇之至
狀頭進士都奭珪幼學孫養元朴基永狀下幼學

必勲蔡元洛孫養益全五善柳成集都必卓楊沁
朴履坦都珩魯幼學徐杺李浚朴基晋朴基升李邦
成繼魯李瀗李湙朴基洪朴履周朴履晋楊濯
履祥
孫廷煥郭鎭澤趙在龍趙泰龍趙時龍都鼎珪
都冕珪蔡元祥蔡元休孫承振郭龍一柳養文鄭有
全履善柳養龍都鎭宇楊澈郭廷魯郭馝魯蔡必
趙錫柱都晩珪呉在奎朴墓戩趙羲龍孫養學
鶴振
楊渤孫益振裴瑨朴履基孫廷燦柳應衡進士
成鎭教幼學徐彥浩郭文澤鄭東陽朴履生朴基訥
孫鳳振朴周鉉都晋珪趙錫元朴致林孫敬振趙彙

朴履漸徐元浩郭致翼朴致馨

題曰崔鳳成所犯極爲痛惋已爲捉囚斷當嚴處向事

洞民狀【
甲寅正月崔鳳成又起閙端至呈營府
故遂有民狀及本家狀】

矣洞即故崔翊賛進賜主設立鄕約之洞也進賜主
與洞民鬻由來洞畓五斗落依朱子社倉之規而歛散
之及其儲蓄旣廣則立先公恤貧之庫立春秋講會之
規至蒙國家嘉獎之教便作金石不刊之典則其所重
大何等自別而不意五十年前洞主宅之孽族崔鳳成
父子犯用洞物多至二百餘金而反以荷杖之習敢生破
洞之計撞破洞櫃偸出文案勤奪公田任意斥賣甚
至逐籍割洞之擧而誣辱儒賢無所不至故至有鄕
道之呈卞營府之明決永黜洞案嚴刑遠配而更不
敢接迹於洞里矣去庚寅年間更起閙端故又有士
林之呈卞以至數月之刑囚而又於昨冬做出誣言
暗自呈官得面任査實之題而及其査實之日知其
理屈而自退矣又於今者以虗罔之說呈營呈府威
喝洞民無所不至而觀其狀辭則節節孟浪變幻前日
之名憑藉凶荒之歲以爲破洞之兆朕然洞物之本非
收合則當日儒賢之碑文自在鳳成之永落洞案則前
後營府之決案自在况朝家褒獎之教優異之典昭
如日星炳若丹靑則今此洞約有非尋常洞物之比而
鳳成之變幻事實自稱收合者究其心腸專出於破洞之
計也玆敢聯名仰訴伏乞洞燭教是後亟下嚴斷一以懲誣
罔之奸習一以保百年之洞約千萬望良只
題曰洞約剏設何等重大而公麽支庶焉敢濁亂如或有
更閙之端自洞中捉上宜當事三所任
本家狀【甲寅正月

伏以民等世居此士宗族寔繁而謹守祖先之訓粗
知睦族之義不以支庶而或蔑不以踈遠而或忽苟有
過失則諄諄規勉猶恐人之或知豈欲發之文字登

諸官聽而至於孽族崔興濬鳳成父子旣難以義理
諭之又難以族親待之置之難化之域者殆將五十
年于玆而今又鳳成敢以年前刑餘之蹤欲售暫時
瞞官之計不悛前習幻名鳳成誣訴營府則民等之
疾聲齊籲葢出於不得已也伏願城主試垂察焉民
等從曾祖故翊賛百弗庵公學問精詣踐履篤實
菀然爲先朝之徵士卓乎爲後學之宗師雖其賁
趾林泉未能展布所蘊而惟其一二經濟之畧綽施設
者即夫仁洞洞約是已民之八代祖臺巖公孝廟
幸時師傳當崇禎甲申之後遂入此洞終身不出世

翊賛公爲先躅之在是也鬻洞田一叚依
朱子社倉
之法而歛散之行之有年儲蓄旣廣則置先公庫以應公
家之征賦此則張子畫井之意也置䘏貧庫以助無田之
資活此則周官任䘏之意也又立春秋講會之堂勉之以孝
友睦婣之道勸之以農桑勤苦之業此則呂氏鄕約之法
也一洞之人無不心悅誠服教行俗成至有男女異路頒白
不負戴之美故故領府事李公之按節也特捐營耗五
十包以屬於洞文以識之以至登聞于朝粤我正宗
大王
筵教若曰聞有先公恤貧庫使鄰里不知常賦仍鄕約勤課此等
人必欲見之申飭上來因命道臣謄

上洞約一帙夫以此公山之最深僻處而上徹於九
重之淸燕一畒一頃一丘一壑莫非曾經乙覽中物事
則其良規美制有非么麽輩之所敢跳踉作乖而往
在壬戌惟彼興濬父子多犯洞物形跡莫掩則反以
荷杖之習敢生破洞之計割取公田任意斥賣撞破
洞櫃偸出文案逼逐翊賛公所入之籍不立於本洞
分割翊賛公杖履之地以屬於他里甚至誣辱儒賢
謀禍胄孫孤子之本家幾至覆墜之境百年之美蹟
將無可保之道故鄕道章甫齊聲共討累訴營邑永
黜洞里不敢接跡嚴刑照律至於遠配之境然後旣
廢之洞約始得牽補幾盡之公物始得收聚矣向
在庚寅之歲鳳成復踵前習更起閙端故又有鄕儒之
呈卞以至數月之刑囚而不意昨冬鳳成變幻事實
詐稱收合之洞物暗自呈官得面任査實之題而及
其査實之日渠云理屈而自退矣今又更呈營府咆
喝洞民故民等推見狀辭則無非誣罔之說葢此洞
約之施設鬻一叚洞田而爲之基本則渠所謂六姓
收合云者誣罔一也一叚洞田始於有此洞之時而兩庫
排布成於翊賛公之經濟則渠所謂渠之曾祖主張
作稧云者誣罔二也渠之誣辱儒賢得罪鄕道永
黜洞案至於遠配則渠所謂本無落稧云者誣罔三也洞
約節目一依呂氏鄕約移居則落案有罪則永削已爲百
年之定規則渠所謂洞主之以私嫌不許更八云者誣罔四
也昨冬面任査實之時渠云理屈而自退乃面任之目覩
也一面之共知也則渠所謂面任之不能査報云者誣罔
五也其他誣罔之說有不可枚擧而最其奸慝者渠之
父子罪狀已有前後營邑之斷案故變幻名字藏頭說
話外假荒歲之名內懷破洞之計則民敢安敢以事係
族親而强爲之容貸乎玆敢以曾前營邑完文及決立
案鄕道儒狀仰訴於明政之下伏乞洞察事實轉報上
營一以懲誣罔之奸習一以保百年之美蹟千萬無任
祈懇之至
題曰崔鳳成前後所犯無非罔赦之罪案苐觀下回
當有別般嚴繩向事
本家呈營狀【甲寅正月

伏以爭訟質成本非美俗雖在路人亦所當戒况於族親
之間豈肯爲應卞之擧而至於孽族崔興濬鳳成父子
旣難以義理諭之又難以族親待之置之難化之域者殆
將五十年于玆而今又鳳成不悛年前竄配之典欲售
暫時瞞官之計敢以先賢經濟之約鄕稱以渠祖收
合之私物幻名鳳來誣訴棠營至得量宜助給之題則
生等今日之疾聲齊籲葢出於不得已也生等從曾祖
翊賛百弗庵公乃先朝之徵士後學之宗師賁趾林
泉未能展布素蘊而惟其一二經濟之畧施設者即夫
仁洞洞約是已生之八代祖臺巖公孝廟潜邸時
師傳當崇禎甲申之後遂入此洞終身不出世焉
翊賛公爲先躅之在是也鬻由來洞田一叚依朱子
社倉之規而歛散之行之有年儲蓄旣廣則立先公庫以
應公家之賦此則張子畫井之義也立䘏貧庫以助無
田之資活此則周官任䘏之義也又立講會之堂勉之以孝
友睦婣之道勸之以農桑勤苦之業此則呂氏鄕約之法
也一洞之人無不心悅誠服教行俗成至有男女異路頒白
不負戴之美故領府事李公之按節也特捐營耗五十包以
屬於洞文以識之此洞美蹟此猶可據况正廟朝筵教
若曰聞有先公䘏貧庫使鄰里不知常賦仍鄕約勤課
此人必欲見之申飭上來因命道臣謄上洞約一帙夫以
公山之最深僻處而上徹於九重之淸燕一畒一頃
一丘一壑莫非曾經乙覽中物事則其良規美制有非
么麽軰之所敢跳踉作壞者較然明矣而徃在壬戌年
間惟彼興濬父子多犯洞物形跡莫掩則反以荷杖之
習敢生破洞之計割取公田任意斥賣撞破洞櫃偸出
文案逼逐翊賛公所入之籍不立於本洞分割翊賛公
杖屨之地以屬於他里甚至於誣辱儒賢謀禍胄孫
孤子之本家幾至覆墜之境百年之美蹟將無可保之
道故鄕道章甫齊聲共討累次呈營時則有若盤湖
尹相公之明決嚴刑照律至於遠配永黜洞案不敢接
跡然後旣廢之洞約始得牽補幾盡之公物始得收聚
矣向在庚寅鳳成不悛前習更起閙端故又有士論之
齊發以至數月之刑囚而不意昨冬鳳成又變幻事實
暗自呈府得面任査實之題而及其査實之日渠云理
屈而自退矣今又更呈上營咆喝洞民故生等推見狀
辭則無非誣罔之說夫此洞約之施設鬻一叚洞田而
爲之基本則渠所謂六姓收合云者誣罔一也一叚洞田始
於師傳公之時而二庫排布成於翊賛公之經濟則渠
所謂渠之曾祖主張作稧云者誣罔二也渠之誣辱
儒賢得罪鄕道永黜洞案至於遠配則渠所謂本無
落稧云者誣罔三也洞約節目一依呂氏鄕約移居則落
案重罪則永削已爲百年之定規則渠所謂洞主之以
私嫌不許更八云誣罔四也其他誣罔之說有不勝枚擧
而最其好慝者渠之父子罪狀已有營府之斷案故變
幻名字藏頭說話外假荒歲求助之名內懷破約隱
微之計若使鳳成得遂其奸計則洞約自破矣洞約破
則賢蹟自泯矣賢蹟泯則正廟朝華袞之褒優異之
典將無影響之可尋矣生等安敢以事係族親而强
爲容貸乎玆敢以曾前營府文券洞約節目貼聯仰訴
伏乞特垂燃犀之明洞治鬼蜮之狀以保先賢經濟之
蹟千萬祈懇之至
題曰隻民捉來以此節目詳細曉飭俾無更爲健訟
之弊宜當事本官
營題到付本府狀
伏以民以崔鳳成意外起閙事呈議送題下故玆以到
付恭俟處分事
題曰依營題移文捉來事
崔鳳成官庭納侤
甲寅正月十八日柒谷崔鳳成年六十六白等矣身當此
灾歲窮不能自存不顧先世遺訓妄生非理之計搆捏諸
宗毁劃洞約敢呈營邑是白如可今至諸宗及夫仁洞洞
民之對擧奸狀綻露濫意莫售自顧所爲萬萬狡惡更無
敢如是之意如是納侤前呈營邑狀00023並以現納爲乎矣日
後如有起閙之弊依先賢洞約即爲報營刑配教事
夫仁洞誌
先公䘏貧二庫節目詳嚴經用有條至有營府完文
而本洞李昌振鄭允基等以年前新接之蹤不知洞
約之所重遂欲分割庫財別作一洞而爲私槖之計搆
誣呈官別題曰徃告于崔翊賛宅以待處分一一而彼軰
狀辭旣是誣罔故洞民及本家次第擧狀卞誣
洞民狀【甲寅二月

伏以夫仁中山洞有二名而其實一洞也洞在公山之最深處
故崔師傳進賜主崇禎甲申後隱居此洞與洞人結社
立籍紏檢民俗而至翊賛進賜主之時遺風尙存且有
約中遺來畓五斗落遂與洞人斥賣長息物力旣瞻則
依張子畫井之制周官任䘏之意立先公䘏貧二庫當日
世居者約內也其後新接者約外也然約中節目雖約
外之人同叅於賑恤顧助於葬喪至於公稅亦有需米助給
之例則約外之蒙惠亦且厚矣洞中軍伍之用閒雜之費則
葢以勿侵二庫之意已有營府之完文故別儲如干洞物以
副其用矣不意本洞李昌振鄭允基以年前新接之蹤
先倡分洞之說至於誣呈官庭噫渠所謂分洞云者以別
儲洞物屬之約外而自爲一洞軍役雜費屬之二庫而
亦爲一洞之計也然夫仁中山自是一洞而約內約外互
相連簷則何以連簷而分洞乎然而猶且分之則朝
家眷注之洞先賢井田之制將歸於片片破碎而二庫施
設無以支堪於軍役雜費之侵矣昔年有作梗洞約者
以分洞一事爲破洞之先路而至被刑配之典繼有營府之完文
及決案末乃依舊合洞已成金石斷案則至于今日孰敢以
分洞之說無難於發諸口也渠所謂狀頭一則自退一則割
名其誣罔之狀此亦可見而惟李昌振鄭允基一向肆惡
頑不知戢此而不治則無以杜日後之弊玆敢聯名仰訴伏
乞洞燭教是後依法懲治以保百年鄕約之洞事
題曰百年洞約渠軰焉敢沮戱於其間哉當嚴懲無據
之習日後倉庭捉待宜當事
本家狀【甲寅二月

伏以夫仁之洞一名中山而其實一洞也民之曾祖翊賛公
與洞民依藍田鄕約之法而置先公恤貧二庫當日同約者約
內也其後新接者約外也洞約節目雖約外之人荒年則賑䘏
之喪葬則顧助之公稅之時亦有需米劃給之例而但洞中閑
雜之費軍伍之用則不敢侵於二庫者葢以二庫之所重自別而
營府之完文嚴明故也所以別儲如干之財以應一洞之雜用實
由約內人宣力而成者然是則約內約外一軆統同則約外之蒙
惠亦厚矣而不意本洞新接者李昌振鄭允基素以一面之弊

民徒恃邑中之有權陰嗾金守成羅達俊敢以破約之心
先倡分洞之說至於誣訴官庭渠所謂分洞云者以別儲之
物全屬約外爲渠軰之私槖以軍伍雜費全屬二庫爲破約
之奇計也噫夫仁中山自是一洞則何以分洞約內約外連墻
接籬則何以分洞昔年崔興濬之謀破洞約也先以分洞一事
爲第一妙策而及其刑配之日至有營府之完文決案以依舊合
洞之意已成不易之斷案則有非今日么麽軰之所敢濁亂而
惟彼李昌振鄭允基金守成羅達俊敢以誣罔之說欲售
暫時瞞官之計今則奸狀綻露羅達俊自退而落
守成
割名而退而惟李昌振鄭允基一向肆惡以黃得烈
偸名塡之於題下之後期欲破洞而後已故玆敢仰訴于
明政之下伏乞李昌振鄭允基兩漢捉致嚴懲以杜後
弊千萬祈懇之至
題曰知罪改過者不足深責是矣不悛前習之兩漢今
十七日倉庭捉待則當別般嚴懲以杜後弊事
鄭允基等見捉致嚴繩之題十七日倉庭先入呈訴則題
曰該洞非但崔氏百餘年舊基契約傳之子孫不易之典則
約外之人豈敢曰是曰非若欲化外移居可也期欲異論
刑配可也何不深思之若是事允基等自服納標乞其自
外勘處故即以標紙呈官特蒙踏印題下
鄭允基等納標
甲寅二月十七日爲納標事矣等妄以夫仁分洞之意再次
呈狀則題音極爲惶悚兺除良且右宅傳來契約若是
截嚴故以自服之意如是納標爲去乎日後更有如
許頑習以此標告官憑考事
題曰悔過自服不必深誅此後更勿干涉於莫重稧約
宜當向事
本府完文【甲寅二月

右爲完文成給事夫仁一洞即百弗庵崔公經濟之地
而先公之倉恤貧之庫實倣藍田鄕約之規張子畫井
之制至蒙朝家嘉奬之教故前後營府次第完文一以
杜分洞之弊一以禁軍役之侵而近聞洞中若而軰先
倡分洞之說以軍役之費敢侵二庫云極爲駭然葢分
割一洞則井制自破矣軍役橫侵則二庫亦破矣豈非
慨然處乎玆以依前合洞之規軍役勿侵之意完文
成給以爲永久遵行宜當者
夫仁洞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