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월 18일 弟 河中煥(1875~1954)이 그 주혼자 이름과 그 처의 고향, 사는 곳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보낸 편지
1948년 1월 18일 弟 河中煥(1875~1954)이 그 주혼자 이름과 그 처의 고향, 사는 곳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일찍이 존좌의 ‘一灘纔渡一灘撗’의 구절을 읽었는데, 요사이의 겪은 것을 되돌아보니 선견지명에 세 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 구절은 ‘한번 여울을 겨우 건너니, 하나의 여울이 가로지르네.’라는 뜻일 듯한데, 하중환은 이제부터 몇 번의 가로지르는 여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때를 잘못만난 것이 진실로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선 존좌께서 세밑에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이제 뜰의 蓂莢이 새로 세 잎이나 떨어진 이후에야 뒤늦게 답장을 쓴다고 하고 그간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답장이 늦었지만 이때에 다만 만수무강을 빌고, 집안의 복을 기린다고 하였다. 명협은 중국 요임금 때 났다는 상서로운 풀의 이름인데,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매일 한 잎씩 났다가 열엿새부터 그믐날까지 매일 한 잎씩 떨어져 이것으로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어 자신은 열흘 동안 한 번 집이 뒤집어지는 곤함을 당했는데, 마치 도적이 몰수한 듯 했다고 하였다. 다만 슬하의 셋째 아들은 겨우 호환, 곧 돌림병에서 벗어났으나 남은 경계는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周岑이 규수의 집에서 姜大夢 군에 대해서 다시 날짜를 조율하여 4월 13일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상대방 쪽에서 이날을 쓸지, 또한 혹 다시 날을 택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주혼자 이름 세 자는 李宜炅이고, 그 처의 고향은 明溪[명잦]이며, 사는 곳은 와룡면 주하동이라고 하였다. 편지를 통하는 한가지 일은 저희 쪽에서 믿을만하게 전하지 않는다면 우편으로 왔다갔다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편의를 따라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고 어떠하겠냐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
발급인 하중환의 본관은 晉州, 출신지는 西後面 校洞이다. 1907년 3월 柳寅植·金厚秉·金東三 등과 함께 근대 중등교육기관인 協東學校를 설립하는 데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4월 1일 정부가 지방비법을 공포하여 유림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의 公物을 몰수하여 지방비로 쓰게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류인식·김동삼·김후병과 함께 기성회를 소집하여, 유림 다수의 찬성을 이끌어 내고 학부의 승인을 얻어 虎溪書院의 재산을 협동학교에 귀속시켰다. 또한 그는 1908년 3월 15일에 설립된 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본회 圖書部 편술원·평의원·간사 등을 역임하며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