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16일 柳東蓍가 상중에 있는 사돈의 부친 中祥 제사에 나아가지 못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으로 사돈에게 보내는 편지
1942년 6월 16일 柳東蓍가 상중에 있는 사돈의 부친 中祥 제사에 나아가지 못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으로 사돈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본문은 편지의 예식을 생략한다고 쓰고, "세월이 어느덧 흘러 先父君의 中祥이 이르니 효자의 끝없는 아픔을 더욱더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러한 때에 여러 상복을 입고 계시는 분들의 건강이 만 가지로 보중하시며 스스로를 지탱하고 계시는지요. 그 때문에 슬프고 그리운 마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저는 의당 將事(제사지내는 일을 맡아함)의 자리에 달려가야 하나 더위를 먹고 허덕이고 있고, 몸 또한 건강하지 않습니다. 당초에는 당신이 계신 곳에서 돌아서 海里에 위문 길에 오르려 했으나 대지가 타는 화로 같아 문을 나가는 것이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아 돌아오는 것이 嗷嗷합니다. 이목에 차마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그만두어버렸습니다. 며느리의 예정된 약속은 가야하나 근 몇 달 병에 시달리다가 근자에 조금 좋아졌습니다만, 찻길의 염천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몹시 걱정이 되는 일입니다. 아들이 마땅히 함께 가야하나 또한 원객이 와서 방해하여, 기일을 미리 점쳐 말하기 어려우니 사세를 보고 명하여 보내도록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추록을 붙여 "마땅히 힘을 합쳐야 하나, 시세와 무더운 여정 때문에 부득이 그만두었습니다. 제수가 될 만한 물건이 없어 이에 20원을 부쳐드리니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고 하면서 사돈으로서 부조를 보탠 정성을 기록하고 있다.
발신자 柳東蓍(1886~1961)의 호는 一滄으로 부친은 柳淵博이요 柳致明의 종손이다. 1919년 고종 인산에 참가 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후 柳東泰‧李均鎬‧柳淵成 등과 거사를 계획하고 협동학교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3월 21일 주재소로 가서 무기와 중요한 서류를 파기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다가 문중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류동시의 아들은 澤蕃이고, 사돈은 진주 강씨 承鳳이다.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