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2월 7일에 영해 괴시리의 南孝順이 상대방 집을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아 안동 임하에 사는 전주 류씨 호고와댁에 보낸 안부 편지
1938년 12월 7일에 영해 괴시리의 南孝順(1863∼1942)이 상대방 집을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아 안동 임하에 사는 전주 류씨 호고와댁에 보낸 안부 편지이다.
편지는 올 봄에 상대방을 만난 것과 그 이후의 심경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봄 동안 좋은 만남은 십년 우러러 사모한 것에 족히 위로가 되었으나 이별 후의 나머지 쌓여 있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아직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隱侯의 詩’의 진절함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은후’는 중국 梁나라 沈約의 시호이며, 그의 시는 ‘別范安成’을 가리킨다. 그 내용은 "生平少年日分手易前期 及爾同衰暮 非復別離時 勿言一尊酒 明日難重持 夢中不識路 何以慰相思(우리네 인생살이 젊을 적에는 헤어져도 만날 기약하기 쉽더니, 그대와 함께 늙은 지금 이 시절, 더 이상 헤어질 때 말고 한 잔 술 별거냐고 말하지 마소, 내일 다시 이 술잔 잡기 어렵네 꿈속에 찾아갈 길 알지 못하니, 무슨 수로 그리움을 달래 보리오)"1)1) 『古今詩刪 卷9 梁詩』(한국고전번역DB 참조)
이다.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은 겨울은 이미 깊고 경계는 조용한데, 집안은 더욱 맑고 화목하며 뜻은 오로지 정밀한지 물었다. 염옹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친구의 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염옹이 돌아간 이후 상대방이 무거운 부담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힘을 쓸 것은 언급하지 않아도 당연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숙부님의 연로하신 체후는 편안하고 그 집의 온갖 일들도 상대방이 몇 년 동안 힘을 다하여 노력한 나머지 이제야 그 수고한 효과가 드러난다고 하였다.
멀리서 상대방을 향한 치닫는 그리움이 절절한 가운데 발신자는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으나 정신이 쇠삭하고 地氣의 무너짐은 날마다 심하다고 하였다. 酬應도 절도가 전혀 없으니 참으로 스스로 가련하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절박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벗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줄어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으나 ‘그 아이’의 행차가 쇠퇴해지는 나이에 풍한을 무릅쓰는 것이어서 매우 염려가 되고, 상대방 집에 들러 문후할 것으로 생각되나 과연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추신에는 ‘◘臺’라는 인물의 근래의 절도는 한가지로 평안할 뿐이라고 전하였다.
발신자 남효순은 영해 괴시리 출신으로, 본관은 영양, 자는 達夫, 호는 未齋이다. 아버지는 南朝{氵+昇}으로, 金興洛의 문인이다. 괴시리의 원래 이름은 濠池村이었는데, 고려 말 이곳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본인의 고향이 중국의 槐市와 많이 닮았다 하여 괴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양 남씨는 1639년 이곳에 정착한 이후 세거하게 되었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