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2월 4일, 柳寅植이 柳璋植에게 숙부 상을 당한 슬픔을 위로하고 문중의 수계 일을 상의한 후, 자신 쪽의 상례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속히 한 번 와주기를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925년 2월 4일, 柳寅植이 柳璋植에게 숙부 상을 당한 슬픔을 위로하고 문중의 수계 일을 상의한 후, 자신 쪽의 상례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속히 한 번 와주기를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집안의 재앙이 혹독하여 상대의 숙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전염병으로 의심스러운 증세와 상대의 종기 때문에 지정 친척 중 아무도 염습과 장사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쇠잔한 모양이 극도에 이르렀음을 한탄하고, 상대가 애통한 심경을 어찌 견디는지 걱정하였다. 또 세초에 보내준 문안 편지에 대해서는 팔을 앓느라 글을 쓰기 어려운 데다 곧 만날 약속이 있어서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막혀 함께 계획하고 걱정해야 할 일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다 하였다. 이어서 추위가 매우 심한 때에 복제 중에 조섭은 어떠하며 종기는 아물어서 움직일 만한지를 묻고, 아들과 식구들, 안마을 노인과 寓極 從[이름이나 자가 우극인 동항의 친족]의 근황, 촌내의 사정은 어떠한지 일일이 궁금하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형제가 모두 누워 앓고 있는 중으로 끝내 병으로 죽고 말 것이라 하고, 막내아우의 수척한 증세는 날로 더하니 죽을 염려가 없지 않으며, 가족들과 촌내 노소들도 병들지 않은 이가 없어 두렵다고 하였다. 또 맏아이는 앓았던 병이 재발하여 宣西로 보내 약을 먹게 하고, 잠시 식구들을 나누어 간호하게 하였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禊를 모으는 것은 문중의 큰일로 믿을 사람이 상대뿐인데, 병을 앓는 중이라 모일 수가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늦은 계절이니 추수한 뒤로 물려서 설립하자고 하지만, 이는 마땅히 합석한 후에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葬地에 대해서는 애초에 敬可를 통해 좋은 터를 사서 옮기려고 막 수속하여 청원하려는 차였으나 결국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평소 몽매한 자신이 장례 일자를 잡지 못하고, 부득이 報恩에다 속히 들어오도록 통지하였지만, 3백 리나 먼 곳에서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을 것임을 걱정하였다. 擇日은 내달 18일로 하였지만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날짜만 보내고 있다고 전한 후, 일간 병세는 어떤지, 맏형님의 근황은 어떤지를 묻고 속히 함께 와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인 류인식(1865~1928)은 본관은 全州, 자는 聖來, 호는 東山이다. 柳必永의 아들로 3종숙인 柳祈永에게 입양되었다. 金道和의 문인으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李中業·李相龍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1910년 경술늑약 이후로 평생을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저술에 『大東史』, 『大東詩史』, 문집에 『東山遺稿』가 있다. 1982년 建國勳章 獨立章에 추서되었다.
수신인 류장식(1875~1950)은 자는 圭範, 호는 可林 또는 癡廬이다. 好古窩 柳徽文(1773∼1827)의 현손이다. 西坡 柳必永에게 수학하고, 1911년에 고조부 호고와의 저술 『滄浪答問』, 『小學後篇編』, 『濂洛補遺』, 『皇明續綱目』등을 교정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