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7월 23일, 柳鳳熙가 거처를 옮기는 계획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25년 7월 23일에 柳鳳熙(1855~1927)가 거처를 옮기는 계획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 내용으로는 먼저, 초가을철의 가족들과 마을의 안부를 물은 뒤 桂谷(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喪事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고, 東峴, 水下(무실 이하 한들, 박곡)의 안부도 두루 물었다. 족질인 자신은 근래 병이 없고 식구들도 예전대로 편안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宣城邑으로 寓所를 옮기는 계획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집값을 마련하는 것은 애초에 말해 무엇 하겠느냐고 하였다. 地運으로 말할 것 같으면 於山의 북쪽기슭은 숙부께서 예전에 이웃한 곳이니 우선 작은 집 한 칸을 두고 오가는 것이 좋은 계책일 것 같다고 하였다. 滴巖이 언급한 일은 峴疏에서 參看할 만하고 譜事에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서 이미 三峴에 알렸다고 하였다. 또한 옛 문집은 근래에 몇 질을 인출했는지를 묻고, 원근에서 보기를 구하는 자가 모두 향하여 사모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도의 趙成珉(1879~1952) 같은 자는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은 것이 이미 많고 실학으로 뜻을 두었는데 그것을 듣고서 홀로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청하였으며, 자신도 객지생활을 하고 있고 다른 도에 있는 집안 종사의 자취는 죽기 전에 급히 보아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추록 내용으로, 於山에는 좋은 곳이 없으니 형제가 서로 이웃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급자인 류봉희의 본관은 全州, 자는 德允, 호는 石南, 부는 柳元植이다. 저서로는 石南遺稿가 전한다.
편지 내용에서 언급된 조성민은 자는 建咸, 호는 心汕, 부는 任衡, 생부는 麟衡이다. 경술국치 이후에 중국에서 구국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고, 그 뒤 풀려나왔다가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경학과 역학에 힘썼고, 저서로 『심산유고』 6권이 있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