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4월 5일에 영해 괴시리 출신의 南孝舜이 영양 주곡의 혼인 장소에서 상대방을 만나고 돌아와서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낸 편지
1924년 4월 5일에 영해 괴시리 출신의 南孝舜(1863~1942)이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내는 편지로, 혼인 장소에서 상대방을 만나고 돌아와 쓴 것이다.
두 사람은 10년 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다가 혼인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여러 날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게 되었다. 모임 이후 발신자는 영해로 돌아오고 상대방의 행차는 장차 湖로 돌아갈 것인데, 쇠약하고 늘그막 나이에 이르러 갈림길에 임하니 몹시 섭섭한 감정이 든다고 하였다. 진실로 ‘은후의 감회’1)
가 있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 것은 응당 이별 후에 만날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면서 헤어진 회포를 말하였다.
편지에서 말한 은후는 중국 梁나라 沈約의 시호이다. ‘隱侯之感’이란 표현은 은후의 시 ‘別范安成’에서 드러낸 감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生平少年日分手易前期 及爾同衰暮 非復別離時 勿言一尊酒 明日難重持 夢中不識路 何以慰相思(우리네 인생살이 젊을 적에는 헤어져도 만날 기약하기 쉽더니 그대와 함께 늙은 지금 이 시절, 더 이상 헤어질 때 말고 한 잔 술 별거냐고 말하지 마소 내일 다시 이 술잔 잡기 어렵네 꿈속에 찾아갈 길 알지 못하니 무슨 수로 그리움을 달래 보리오)"2)2) 『古今詩刪 卷9 梁詩』(한국고전번역DB 참조)
의 내용이다.
이어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服中의 상대방의 생활은 어떤지 묻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마음에서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본인은 문을 닫고 외출을 삼간지 몇 년이 되었으며,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을 분수로 여겼는데, 이번 외출로 신부의 현숙함을 보고 또 여러 선비들과 단란한 가운데 열흘을 보냈으니 답답함을 깨트릴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진실로 기이한 일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고생은 별것 아니라고 하였다. 또 집에 돌아온 날 어린 손자 또한 도착하여 상대방의 행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바쁜 가운데 대신 쓰게 하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하였다.
발신자 남효순은 영해 괴시리 출신으로, 본관은 영양, 자는 達夫, 호는 未齋이다. 아버지는 南朝{氵+昇}이며, 金興洛의 문인이다. 괴시리의 원래 이름은 濠池村이었는데, 고려 말 이곳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槐市와 많이 닮았다 하여 괴시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괴시리에는 동해안 3대 평야 중 하나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영양 남씨는 1639년 이곳에 정착한 이후 세거하게 되었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