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19일에 외사촌 아우 吳錫燾가 산모인 며느리를 간호하느라 상대방의 행차가 다음달 10일 사이라면 만날 수 있지만 그 보다 이르면 보지 못할 것이라며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낸 편지
1923년 1월 19일에 외사촌 아우 吳錫燾가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내는 편지로, 산모인 며느리를 간호하느라 상대방의 행차가 다음달 10일 사이라면 만날 수 있지만 그 보다 이르면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발신자의 늙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상대방 쪽에서 연이어 편지를 보내어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자를 위로하는 정의가 매우 두터워 매우 고마웠다고 하였다. 어느덧 해가 바뀐 지 19일이 지났는데, 형제간에 각각 떨어져 사는 나머지에 함께 모여 송구영신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서 크게 새 복을 받았으며, 집안 형께서는 수체의 섭양이 혹 지나간 추위에 손상을 입지는 않으시고, 새해맞이 음식은 큰 부족함이 없었으며, 혈기와 기력은 더욱 신의 도움을 받으시고, 아드님과 여러 종숙질도 모두 편안하게 부모님을 모시고 계신지 물었다. 이어 그립고 또한 축원하는 마음 지극하다고 하였다.
朞年服을 입고 있는 본인은 곤란을 겪어온 것이 돌에 걸려 넘어져 가시나무에 쓰러질 뿐만 아닌데, 지금 또 관에 들어가는 것조차 보지 못하는 서글픈 감정을 전하였다. 백형의 건강도 때때로 좋지 못하고 남은 그 밖의 근심도 한둘이 아니니 매우 답답하다고 하였다. 오직 喪中의 아이는 근근이 지탱하고 일전에 손자를 얻었는데, 우선은 별 탈이 없으니 이것은 그런대로 즐거움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殷老가 돌아올 시기는 언제인지 상대방에게 물었다. 새해에 날마다 가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으나 다만 진흙길을 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당내에 緦麻服 입는 상을 당해 겨우 초종을 마치고 출발하여 鼎足에 이르렀는데, 매우 추워 지팡이를 돌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안어른이 없는 집안에 시아버지가 산모인 며느리를 간호하기 때문에 초칠이 지나기 전에는 몸을 빼내기가 힘든데, 만약 상대방의 행차가 다음달 10일 사이라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으나 만약 이보다 앞당겨진다면 필경 보지 못하고 멀리 이별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이어 시국에 대한 의견을 적었는데, 암울한 세상에 팔을 걷어붙이고 호기를 부리는 신진들은 지극한 정으로 견주어 볼 때, 길가는 사람과 다름없이 여기고 예의를 버린 것을 영웅호걸로 받드니, 이는 밤낮으로 탄식할 바라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다시 상대방이 언제 길을 떠나는지 인편으로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하였다.
발신자 오석도가 쓴 편지의 ‘계해년’을 ‘1923년’으로 추정한 이유는 金秉宗(1871~1931)의 『秀山集』에 1927년 김병종이 오석도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고, 李中均(1861~1933)의 『東田集』에도 1928년 이중균이 오석도에게 쓴 편지가 있으며, 1931년 안동 校洞道會所 통문에 오석도가 연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