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 18일, 金道和가 李燦和에게 先祖 樂山先生의 묘도 문자를 지어 보내며 보낸 편지
1909년 2월 18일, 金道和가 李燦和에게 先祖 樂山先生의 묘도 문자를 지어 보내니 쓸 수 있을 것인지는 상대 쪽에서 잘 판단하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만나고 헤어진 일이 아득하여 唐棣의 탄식1)1) 唐棣의 탄식 : 사는 곳이 서로 멀어 만나지 못함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아가위꽃이여, 바람에 펄럭이도다.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을까마는, 집이 멀기 때문이라네.[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라고 한 말을 가차하였다.
만 할 뿐이었는데, 뜻밖에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받으니 편지에 말씀한 뜻이 진중하여 무슨 말로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편지를 통하여 이 봄에 건강과 생활이 때와 같이 진승하며 식구들도 고루 복을 받고 계심을 알게 되니 매우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병든 목숨을 구차히 연명하며 자리에 누워 지내면서 저승사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니 아무 좋은 경황이 없다 하고, 손자아이들에게 탈이 없는 것이 다행일 뿐이라 하였다.
상대의 先祖 樂山先生에 대한 묘도 문자를 짓는 것은 막중한 일인데 늙어 쓸모도 없는 자신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하고, 마땅히 백배 사양해야 할 일이나 선대의 교분이 깊었으므로 감히 말씀을 어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병을 앓는 여가에 겨우 지어 올리지만 쓸 수 없을 것임은 잘 알고 있다고 하며 한 번 살펴보신 후에 쓸지 말지를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樂山은 李河[退溪의 중형]의 아들 完의 호이다. 자는 子固, 호는 企庵, 또는 樂山이라고도 한다.
발신인 金道和(1825~1912)는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柳致明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을미년에 明成皇后가 일제에 의해 살해되자 도내에 倡義 通文을 보내고, 1896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수신인 李燦和(1843~1925)는 자가 齊佰, 호는 可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李晩恁이다. 손자 李範敎가 김도화의 손자인 獻周의 사위가 되어 양가가 사돈의 관계가 되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