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4월 5일 金道和가 某人에게 先先生의 묘갈에 대하여 글에 대한 감식을 가진 문내 사람들에게 이의가 없었고, 여러분들의 의견에 따를 경우 다 뜯어고쳐야 할 듯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904년 4월 5일 金道和가 某人에게 先先生의 묘갈에 대하여 글에 대한 감식을 가진 문내 사람들에게 이의가 없었고, 여러분들의 의견에 따를 경우 다 뜯어고쳐야 할 듯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오래 소식을 듣지 못하여 그립던 차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보내주니 매우 감사하다고 하며, 더구나 이 4월에 상대의 공부하는 생활과 여러분의 근황이 평안함을 알게 되니 매우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白首가 된 나이에 아내를 잃었는데, 저승으로 가는 데도 차례가 있으니 한탄스럽다고 하고, 오직 상주가 된 아이들만은 잘 부지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하였다. 先先生의 묘갈명은 이전에 완성한 초본을 景達 형과 확인하였고, 繼八 또한 흠잡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하며, 지금 여러분들의 지적이 이와 같지만 자신의 쇠폐한 정신으로는 두루 미칠 수가 없다고 하고, 여러분의 의견에 따라 수정해야겠지만 손가는 대로 수정할 경우 다 뜯어고쳤다는 탄식이 있을 듯하며 나중에 오늘과 같은 의견이 없을 것이라 보장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여기 보내는 경달 형의 편지를 함께 펴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내용에서 언급한 선선생 묘갈명은 자신이 찬술한 好古窩 柳徽文의 묘갈명을 가리키는 말이고, 묘갈을 함께 검토하였다는 사람, 곧 景達은 柳必永(1841~1924)의 자이며 繼八은 柳昌植(1858~1912)의 자이다.
발신인 金道和(1825~1912)는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柳致明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을미년에 明成皇后가 일제에 의해 피살되는 사변이 나자 도내에 倡義 通文을 보내고, 1896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