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10월 27일 안동 금계에 사는 西山 金興洛이 상대방의 종숙부를 만난 소회를 담아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낸 편지
1878년 10월 27일 안동 금계에 사는 西山 金興洛(1827~1899)이 상대방의 종숙부를 만난 소회를 담아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보낸 편지이다.
상대방의 소식이 뜸하여 서운했으나 보내준 편지에 충분히 쏟아낸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확트여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였다.
이어 편지를 통해 상대방 부모님의 기거는 만 가지로 복되시고 부모님을 모시는 나머지의 공부하는 재미는 좋으며, 질녀의 근황은 편안함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근년에 거듭 참척이 있다는 소식에 매우 놀랐다고 하면서 상대방은 대처하는 것을 평탄하게 해서 가슴 속에 담아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도둑의 액회는 매우 혹독하여 걱정을 멈출 수 없다고 하였다.
본인은 쇠약한데다 병이 교대로 침범하여 쇠퇴함이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가을 이후 일에만 힘써 많이 움직이는 경계를 오래 범하여 비루한 싹이 날로 쌓이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면서 이처럼 골몰하다가 생이 끝날까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상대방은 일찍 대업을 궁구하여 본인처럼 늙은이가 이룸이 없는 것과는 같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으며, 상대방의 종숙부가 이곳에 온 것은 뜻이 은근하다고 할 만하나 일이 어긋나서 서로 대할 때 분주하여 조용히 이야기 나눌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재예가 일찍이 숙성하고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량이라고 하니, 장차 이루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돌아가면 모름지기 ‘박문약례’하고 가학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에게 있도록 바란다고 하였다. 등불 아래에서 대충 쓰느라 글로는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했는데, 묵묵히 알아주길 바란다고 하면서 편지를 맺었다.
발신자 김흥락의 본관은 의성이고, 호는 西山이며, 柳致明의 문인이다. 학덕이 높아 근세 영남 유림 가운데 빼어난 존재로, 1867년 음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유일로 천거되어 持平, 承旨 등에 올랐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