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12월 17일, 金興洛은 자신과 주변의 근황을 전하고 霖山書堂의 재건과 부탁하신 先稿에 대해 상대방에게 전하는 편지
1890년 12월 17일, 金興洛은 자신과 주변의 근황을 전하고 霖山書堂의 재건과 부탁하신 先稿에 대해 상대방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김흥락은 상대방과 甥女, 子鼎의 안부를 물었다. 상대방에게 衣冠을 갖추고 나아감에 늘그막을 즐기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잊었으리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상대방 집안에 큰 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놀랐는데, 노인이 하늘로부터 稟賦 받은 것이 이 정도에 그치냐며 슬프다고 하였다. 아직 부고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중에 지체된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자정의 得分은 기뻐할만하지만 앞으로의 得失은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김흥락은 자신과 주변의 근황을 전하였다. 먼저 귀와 눈, 정신이 침침해져 마치 西山에 지는 볕과 같다고 하였다. 또 돌림병과 감기도 겪었다고 하였다. 姪은 回冷을 앓고 있고, 孫稚는 점점 커가며 날마다 기운이 더해져 소란을 일으키는데 손자의 애비는 손님 접대와 응대로 이따금 신경을 쓴다고 하였다. 臨淸閣은 별다른 일은 없고 姊兄 李鍾泰은 올겨울에는 기침이 덜한 것 같다고 하였다. 孫의 초례는 婚主가 없고 좋은 계절도 저물어 가 탄식만 나온다고 하였다.
임산서당의 일은 이미 마쳤다고 하였다. 다만 廚舍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놀랐는데 그들과 함께 서당을 다시 지었는지 물었다. 錦陽廚舍도 동시대에 화재로 소실이 되었으니 운수가 같지 않겠냐고 하며 柳宗元이 쓴 시를 이야기 하였다.
상대방이 부탁한 先稿는 일이 있어 아직까지 작업을 하지 못했지만 조만간에 부탁한 뜻에 부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식견이 형편없어 선고의 유고 내용을 넣고 뺄 수 있겠냐고 하였다. 그래서 자형 이종태와 충분히 消詳하게 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발신자는 김흥락(1827~1899)으로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金誠一의 胄孫이고 아버지는 金鎭華이다. 柳致明의 문인이고 李滉, 李象靖, 류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관직은 仁陵參奉, 司甕院主簿, 경상도도사,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894년 승정원우부승지와 영해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한말 李敦禹, 權璉夏 등과 교유하였다. 사후 邵溪書堂에 입향 되었다. 저서로 『서산집』 이 있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