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12월 27일, 李精浩가 李燦和에게 〇浦의 패악한 일에 대한 대처를 상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88년 12월 27일, 李精浩가 李燦和에게 자신에게 배우는 상대 아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였음을 말하고, 〇浦의 패악한 일에 대한 대처를 상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추위를 견디느라 덜덜 떨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이때에 연세 높은 어른이 평안하신 것은 상대의 정성 때문이라 하고 형제와 아들들이 모두 잘 지내며 春順諸從[이름이나 자에 ‘春’과 ‘順’ 자가 들어가는 종반 형제들]도 모두 편안한지 물었다.
상중의 자신에 대해서는, 세모에 고아가 된 감회로 구차히 연명하는데, 가족이 병들었음을 고하는 것도 근심스러운 일이라 하였다. 상대의 아들은 여전히 지내지만 노력에 비하여 읽고 터득하는 것이 적다고 하고, 이는 자신이 그를 대하여 말하는 것이 흉내나 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인데, 집으로 돌아가면 혹 기어서 돌아왔다1)1) 흉내나 …… 돌아왔다 : 邯鄲學步를 점화한 말이다. 남의 것을 잘못 흉내 내다가 자기 고유의 것까지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燕나라 壽陵의 미적령자[餘子]가 趙나라 邯鄲에서 빨리 걷는 법을 배우다가 오히려 옛날에 걷던 법마저 잊어버려서 기어서 돌아왔다는 뜻이다.
고 꾸지람을 받지나 않을지 불안하다고 하였다. 〇浦 일이 또 풍파를 일으키니 우리 문중이 대대로 지켜온 文純公 從先祖[退溪先生을 지칭함]의 가법에 어찌 이렇게 패악한 습속이 있을 줄 어찌 생각하였겠느냐 개탄하고, 오랜 병으로 칩거하면서 외부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일이 문중에 관계되니 귀를 막고 싶으나 고언을 드린다고 하였다.
孝巖의 鍾也[이름에 ‘鍾’ 자가 들어가는 사람]가 그 후에 네 곳에다 간청하면서 ‘따로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니 그 간사한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하고, 景九 종을 만나면 대의로 밝게 설명하여 기한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세모에는 상대의 아들을 돌려보낸다고 하고, 추신으로 전복 10매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수신자를 ‘젊은 종손’이라 구별하여 지칭한 것은 이때에 老宗孫 李晩恁이 92세의 노령으로 재세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발신인 李精浩(1834~1907)는 본관은 眞城, 자는 粹吾, 호는 山野이다. 아버지는 周行이다. 저서로 『山野遺稿』가 전한다.
수신인 李燦和(1843~1925)는 자가 齊佰, 호는 可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李晩恁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